
『철학vs철학, 동서양 철학의 모든 것』, 강신주 지음, 그린비, 2010.
# 03. 행복한 삶을 이루기 위한 방법은 무엇인가?
에피쿠로스학파 vs 스토아학파
미래 서양철학 그 가능성의 중심, 헬레니즘 철학
p. 51.
푸코 Michel Foucault라는 현대철학자의 중요성은 그가 권력의 지배라는 문제가 개체의 육체 혹은 내면까지 집요하게 관철된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는데 있다. [...] 도대체 나의 어느 부분이 권력의 노예로 길들여져 있는지, 그리고 아직도 권력에 포획되지 않은 나의 나머지 부분은 어디인지를 확인하는 것조차 만만한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한 생명체로서 개체의 차원에서 볼 때 어떻게 권력에 맞서 싸울 수 있을까? 죽기 전까지 푸코가 고민했던 문제는 바로 이것이었다.
pp. 51-52.
그는 권력으로부터 구성된 주체가 아니라 구성하는 주체를 꿈구면서, 스토아학파 Stoicism가 강조했던 자기 수양의 논리가 가진 중요성을 다시 한번 강조하게 된다. 스토아학파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로 상징되는 고대 그리스철학의 사유 전통에 이어서 등장했던 철학 학파였는데, 헬레니즘 시기에 에피쿠로스학파 Epicurean school와 함께 당시 철학계를 양분하고 있었다. [...] 물론 이것은 푸코의 경우에만 적용되는 현상은 아니다. 알튀세르 Louis Althusser와 들뢰즈 Gilles Deleuze의 사유도 결국은 헬레니즘 철학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알튀세르의 평생 소원은 맑스 Karl Marx가 정치적으로 악용되지 않도록 그의 정치경제학적 저작들에 철학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바로 이 대목에서 그는 에피쿠로스학파의 우주발생론으로부터 중요한 철학적 영감을 수용하게 되면서, 마침내 '우발성의 유물론'을 제안 할 수 있었던 것이다. [...] 들뢰즈의 사유도 헬레니즘 철학, 특히 스토아학파와 깊이 연루되어 있다. 『의미와 논리』를 넘겨보면, [...] 특히 들뢰즈가 가장 깊이 영향을 받은 부분은 "세계는 물체들의 집합체이고 의미는 물체들의 마주침으로 부터 발생한다"라는 스토아학파의 발상이었다. 그에게 있어 의미란 물체들 내부에 본질로 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물체들의 마주침을 통해서 사후적으로 출현하는 것이었다. 결국 스토아학파를 통해 들뢰즈는 자신이 모색했던 '의미 발생의 논리학'에 철학사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데 성공했던 셈이다.
p. 53.
현대 프랑스철학자들이 가진 혁명성 혹은 새로움의 기원은 그들이 지금까지 철학사에서 무시되었던 헬레니즘 철학의 가능성을 새롭게 발굴했다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 [...] 특히 그들에게 강한 영감을 주었던 것은 인간 정신을 물질적으로 독해하려는 헬레니즘 철학의 전통이었다. 플라톤, 기독교, 그리고 데카르트 René Descartes로 이어지는 주류 서양철학 전통이 인간 정신을 물질과는 무관한 정신적 실체로 이해했다면, 에피쿠로스학파나 스토아학파는 인간의 정신을 철저하게 물질적인 것으로 사유했다. 과학적 연구를 토대로 인간을 이해하려는 오늘날의 영미권 철학자들에게 있어 헬레니즘 철학이 보다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 에피쿠로스학파나 스토아학파의 관점은 결국 세계 속에 우리가 어떻게 존재하는지,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두 가지 전형적인 방식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에피쿠로스학파의 독특한 개인주의적 실천철학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세계 전체의 질서에 따르는 삶을 영위하라는 스투아주의의 실천철학을 따를 것인가?
에피쿠로스학파 : "현재 이루어지는 단독적인 삶을 향유하라!"
p. 55.
에피쿠로스와 루크레티우스 Lucretius로 대표되는 에피쿠로스학파는 흔히 쾌락주의 Hedonism를 표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국가와 같은 전체 공동체를 중시했던 대개의 철학자들은 개체의 쾌락을 긍정한 에피쿠로스학파의 입장을 반사회적인 것으로 저주하곤 했다. 하지만 사실 에피쿠로스학파는 개체의 쾌락만을 추구하는 지독한 이기주의자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고대 그리스어에는 '헤도네' Hēdonē라는 말이 있다. 이 개념은 오늘날 성급하게 (개인적) '쾌락'이라고 이해되고 있지만, 사실 이것은 인간이 기쁨이나 유쾌함을 느끼는 모든 체험을 가리키는 포괄적 표현이었다. 이 표현은 에피쿠로스학파가 반사회적이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만약 타자와의 관계가 기쁨과 유쾌함을 낳는다면, 에피쿠로스학파는 그들과 더불어 공동체적 삶을 지향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pp. 56-57.
사실 에피쿠로스학파가 당대의 지식인들로부터 모욕에 가까운 저주를 받았던 것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에피쿠로스학파는 플라톤으로 상징되는 주류 서양철학 전통의 근본 전제들을 강하게 부정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살펴보아야 할 점은 에피쿠로스학파가 공유하고 있던 육체와 정신에 대한 특이한 입장이다. 자유로운 공동체에 대한 해묵은 질시 때문이었는지 에피쿠로스학파의 저작들은 매우 단편적으로만 전해지고 있을 뿐인데,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우리에게 루크레티우스가 지은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De rerum natura라는 한 종류 저작이 전해지고 있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에피쿠로스학파의 전모를 비교적 자세하게 확인할 수 있다. [...] 주목해 보아야 할 점은 루크레티우스가 마음과 육체에 대한 스피노자의 입장, 즉 평행론을 연상시키는 주장을 전개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육체의 역량과 마음의 역량은 반비례 관계가 아니라 비례 관계에 있다고 주장한다. [...] 플라톤 철학이나 기독교에서는 마음과 신체가 대립적인 것으로, 동시에 마음은 신체와는 달리 불멸성을 갖는 것으로 사유되었다. [...] 하지만 에피쿠로스학파에게 "생명력이 있는 실체는 모두 연기처럼 공기 중의 높은 미풍으로 흩어져 버리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에피쿠로스학파의 평행론을 살펴보았다면 우리는 이제 이 학파가 왜 에픽테토스 Epictētos, 50?~138? 같은 스토아철학자로부터 "방탕하다"라고 비판받았는지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다. 사실 에픽테토스는 육체적 쾌감이 정신적 쾌감과 함께 우리 실존의 쾌감을 드러내는 두 가지 측면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의 눈에는 쾌락을 중시했던 에피쿠로스학파가 기본적으로 육체적 쾌락만을 추구하는 것으로 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에피쿠로스학파가 주장했던 쾌락주의의 전모를 직접 살펴보면, 우리는 그의 오해가 얼마나 부당한 것인지를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다음 구절은 에피쿠로스가 메노이케우스 Menoikea라는 젊은이에게 바람직한 삶에 대해 조언하면서 보낸 서신 가운데 일부분이다.
쾌락이 행복한 삶의 출발점이자 끝이라고 우리는 말한다. 쾌락이 원초적이고 타고날 때부터 좋은 것이라고 인정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선택하거나 회피하는 모든 행위를 쾌락에서 시작하며, 우리의 쾌락 경험을 모든 좋은 것의 기준으로 사용하면서 쾌락으로 되돌아간다. ······ 그러므로 우리가 "쾌락이 목적이다"라고 할 때, 이 말은 우리를 잘 모르거나 우리의 입장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방탕한 자들의 쾌락이나 육체적인 쾌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말하는 쾌락은 몸의 고통이나 마음의 혼란으로부터의 자유이다. 왜냐하면 삶을 즐겁게 만드는 것은 계속 술을 마시고 흥청거리는 일도 아니고, 욕구를 만족시키는 일도 아니며, 물고기를 마음껏 먹거나 풍성한 식탁을 가지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모든 선택과 기피의 동기를 발견하고 공허한 추측들 – 이것 때문에 마음의 가장 큰 고통이 생겨난다 – 을 몰아내면서 멀쩡한 정신으로 헤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내는 서한』(Epistolē pros Menoikea)
pp. 58-59.
에피쿠로스학파에게 인간은 쾌락의 존재였다. 인간은 쾌락을 가져다주는 것을 선택하고 쾌락을 방해하는 것을 회피하려는 본질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바로 이 대목이야말로 스피노자 Baruch de Spinoza와 프로이트 Sigmund Freud의 자연주의적 사유 전통이 어디로부터 유래한 것인지 잘 보여 주고 있다. 에피쿠로스와 마찬가지로 스피노자는 인간의 본질이 기쁨을 지키려고 하고 슬픔을 제거하려고 하는 코나투스 conatus에 놓여있다고 정의한 적이 있다. 또한 프로이트도 인간의 행동이 쾌락을 지향하고 불쾌를 피하는 쾌락원리Lustprinzip에 의해 지배된다고 이야기했다. 바로 이들의 관점에 앞서 에피쿠로스학파는 쾌락이야말로 인간 행위의 제1원리라고 확신했던 것이다.
pp. 59-60.
에피쿠로스의 쾌락은 "선택과 기피의 동기를 발견하고 공허한 추측들을 몰아내면서 멀쩡한 정신으로 헤아리는" 지적인 통찰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잘못된 생각으로부터 발생하는 쓸데없는 욕망을 부정하려고 했다. 에피쿠로스학파가 정치적 활동을 멀리하면서 자신만의 공동체 생활을 영위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지금도 그렇지만 국가와 같은 권위주의적 공동체는 명예나 부 혹은 권력을 대가로 인간들로 하여금 상호 파괴 혹은 상호 갈등의 관계에 빠지도록 유인하곤 한다.
스토아학파 : "전체와 조화를 이루는 삶을 영위하라!"
p. 61.
돌돌 말린 실패를 연상해 보라. 스토아학파는 세계와 그 속에서 이루어지는 우리들의 삶의 모습이 마치 실패로부터 실을 푸는 과정과 같다고 이해했던 것이다. 실을 완전히 풀면 우리는 실 중간 부분에 노랗게 염색된 부분이 있다는 것, 혹은 전체 실의 길이가 얼마 안 된다는 것 등을 모두 알 수 있다. 비록 우리가 이런 사실들에 대해 실을 완전히 풀기 전에는 전혀 알 수 없다고 하더라도, 이미 모든 것은 이처럼 결정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이 스토아학파의 핵심적인 견해였다. 스토아학파는 세계가 철저한 인과관계 혹은 인과적 질서에 의해 발생하고 움직인다고 보았다. [...] 결정론으로부터 가장 멀리 벗어났었던 에피쿠로스학파와는 달리 스토아학파는 이처럼 완전한 결정론을 믿고 있었던 셈이다.
pp. 62-63.
만약 전체 우주가 자신만의 고유한 질서 혹은 욕구를 가지고 있다면, 인간은 이러한 전체 질서를 잘 파악해서 그것에 일치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단지 전체의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 존재일 테니 말이다. [...] 우주라는 커다란 실패로부터 풀어져 나오는 실의 작은 마디들에 불과한 우리는 전체 실의 질서에 따르는 삶을 영위해야만 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전체 자연과 조화되는 방향으로 자신의 모든 행동을 조절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 이 때문에 결국 전체 질서에 따라 삶을 영위해야 한다는 것이 스토아학파의 최종적 가르침이 되었다. 스토아학파의 일원이자 로마제국의 황제이기도 했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Marcus Aurelius는 확신에 차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전체에 이로운 것이라면 부분에게도 해롭지 않다. 전체는 그에게 이롭지 않은 것을 지니지 않기 때문이다. ······ 내가 그런 전체의 부분이라는 점을 기억하는 한, 나는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크게 만족할 것이다. 『명상록』(Taeis beauton)
p. 63.
스토아학파의 윤리적 입장을 상징하는 아파테이아 apatheia라는 개념은 바로 이런 삶에 대한 태도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인간의 주관적인 감정 상태로부터 자유로워진 상태가 곧 아파테이아 상태이다. [...] 즉 일체의 인간적 감정으로부터 초연한 상태를 의미한다. 자신의 입장에서 불리한 일이 생기더라도 스토아학파는 결코 그것에 분노하지 않는다. 동시에 자신에게 행운이 닥쳐와도 스토아학파는 함부로 쾌감을 느끼지 않는다. 그것들은 모두 전체 세계가 필연적으로 자신을 전개해 가는 과정, 즉 운명 factum의 과정일 뿐이기 때문이다.
p. 64.
삶에 대해 초연했던 스토아학파의 태도는 여러 면에서 전통 동아시아인들, 특히 유학자들이 보여 왔던 삶의 태도와 유사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진인사대천명' 盡人事待天命이란 유명한 구절을 어디선가 들어 보았을 것이다. "사람의 일을 모두 다 하고, 천명을 기다린다"라는 의미이다. [...] 『삼국지연의』 三國志演義에 등장하는 제갈량 諸葛亮이 말, 즉 "사람의 일을 닦고 천명을 기다린다"라는 의미를 가진 '수인사대천명' 修人事待天命이란 말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유학자나 선비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모두 수행했다면, 그 결과가 불행으로 나타나든 행운으로 나타나든 기쁘게 받아들일 뿐이다. 스토아학파의 철학자나 유학의 선비들이 거의 동일한 삶의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우리의 주의를 끈다.
지은이 코멘터리, p. 65.
헬레니즘 철학은 에피쿠로스학파와 스토아학파로 양분된다. 에피쿠로스학파는 개체의 삶과 개체의 쾌락을 중시한다. [...] 반면 스토아학파는 개체의 삶보다는 전체 질서를 더 중시한다. 그들은 전체 질서가 만약 개체에게 불쾌감을 주었다면 개체는 그 불쾌감을 기쁜 마음으로 수용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흥미로운 것은 개체의 쾌락을 강조하는 에피쿠로스의 사유 전통이나 전체의 필연적 질서를 중시한 스토아학파의 사유가 스피노자에게서 비판적으로 종합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스피노자의 주저 『에티카』(Ethica ordine geometrico demonstrata)에서 스토아학파의 냄새가 나는 주장뿐만 아니라 에피쿠로스학파의 속내를 반영하는 주장도 모두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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