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vs철학, 동서양 철학의 모든 것』, 강신주 지음, 그린비, 2010.
# 01. 사물의 본질이란 무엇인가?
플라톤 vs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 "개체의 본질은 개체를 초월한다."
p. 24.
책상을 보고서 책상을 이렇게 사용되어야 한다고 되풀이해서 중얼거리는 모습, 물론 이것은 사후적 구성의 메커니즘이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또한 이런 반복적인 사후적 응시를 통해 어떤 사물의 본질을 파악할 것만 같은 느낌, 즉 본질에 대한 착각이 함께 발생한다. [...] 흔히 본질주의자라는 사람들은 결과적으로 볼 때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간에 보수주의자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본질주의자는 사물의 사용 목적에 대해 편집증적으로 집착한다.
p. 25.
[...] 이미 오래전부터 동양철학 가운데 불교에서는 공空을 이야기해 왔다. 불교에서 본질이란 것은 '자기동일성'을 의미하는 '자성自性'이라고 불린다. 이런 자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다시 말해 무자성無自性 이야말로 불교에서 가장 강조해 온 '공'의 핵심적인 의미이다. 불교의 공은 본질을 맹신하는 집착 혹은 부자유를 치유하기 위해 제안된 개념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르면 당신이 본질이라고 믿고 있는 것은 결국 당신의 한 가지 집착 혹은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
pp. 26-27.
하지만 비트겐슈타인이란 인물이 등장하기 전까지 서양철학사는 앞서 언급한 불교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그것은 '본질'에 대한 집요한 탐구와 그것에 대한 배타적인 집착으로 규정지을 수 있을 만한 것이었다. 사실 이런 특성은 서양철학의 발원지라고 할 수 있는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탈레스Thales가 세계의 본질을 '물'이라고 이야기했을 때 이미 서양철학은 세계와 만물의 본질, 즉 불변하는 측면을 탐구하도록 강제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로부터 서양철학은 거의 모든 것들에 대해 불변하는 측면과 그렇지 않은 측면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 후대 서양철학자들에게 지속적인 영향을 끼친 답을 제공했던 두 사람의 철학자가 있었다. 본질을 세계 밖에서 찾으려고 했던 플라톤Plato, BC428?-BC348?과 본질을 세계 안에서 찾으려고 했던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BC384-BC322가 바로 그들이다.
p. 28.
물론 현실세계에 삼각형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아름다움 자체, 좋은 자체, 사각형 자체, 동물 자체, 인간 자체란 현실세계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불완전한 아름다움, 불완전한 좋음, 불완전한 사각형들, 불완전한 인간들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 대목에서 플라톤은 묘한 생각을 갖게 된다. 현실에서 확인되는 불완전한 것들은 이데아 세계에 존재하는 완전한 에이도스들의 불완전한 복사물이라고 말이다. 이로 인해 현실세계에 존재하는 복사물들은 원판인 에이도스보다 흐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p. 29.
『파이돈 phaidon』에서 플라톤은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이 아름다움 자체에 의해서 아름답게 된다"라고 이야기한다. 다시 말해 아름다운 사물들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것들이 아름다움 자체, 즉 아름다움이라는 에이도스에 관여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곧 플라톤의 유명한 분유分有, participation 이론을 의미한다.
pp. 29-30.
그런데 현실세계에서 볼 때 아름다운 사물들은 시간이 지나면 그 아름다움을 잃고 추해진다. 플라톤은 이것을 어떻게 설명하려고 했을까? 그에 따르면 이것은 어떤 사물이 더 이상 '아름다움 자체'에 관여하거나 참여하지 않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이다. [...] 아름다움 자체는 글자 그대로 자체적으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우리는 '사각형 같다', '아름다운 것 같다', '좋은 것 같다', '인간답다'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이 점에 대해 플라톤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이런 말을 사용할 때 우리가 '사각형 자체', '아름다움 자체', '인간 자체'를 이미 알고 있는 것이라고 말이다. 이것이 바로 분유설과 함께 플라톤 철학을 구성하는 양대 산맥이라고 할 수 있는 상기설想起說이다. 상기란 아남네시스anamnēsis라는 그리스어를 번역한 말로서 글자 그대로 '잊어버렸던 것을 기억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 플라톤에게 인식epistēmē이란 것이 상기 혹은 기억일 수밖에 없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p. 31.
현실에 살고 있는 인간이 에이도스를 상기하는 것은, 다시 말해 진리를 깨닫는 것은 레테의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운동을 필요로 한다고 볼 수 있다. 진정한 에이도스는 이데아의 세계에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레테의 강을 거슬러 올라가 순수한 에이도스를 본다는 것은 사실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인지 플라톤은 죽음을 찬양했다. 그에게 있어 죽음이란 것은 육체를 벗어나 순수한 영혼으로 되돌아가는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 : "개체의 본질은 개체에 내재한다."
p. 32.
반면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 사물의 본질은 사물을 초월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물 안에서만 찾아질 수 있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물들이 존재하고 있는 현실세계, 즉 땅을 가리키고 있다. 현실세계를 긍정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신은 실체에 대한 그의 생각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범주론』Categoriae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체를 제1실체와 제2실체로 나누고 있다. 그에게 있어 제1실체가 구체적인 개체들, 즉 개별적 사물들을 가리킨다면, 제2실체는 개체들이 속해 있는 종種이나 유類를 가리키는 것이다. [...] 중요한 것은 제1실체가 없다면 제2실체도 또한 존재할 수 없다는 그의 확신이다. 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를 포함한 모든 인간들이 현실세계에서 전부 사라진다면, 인간이라는 제2실체는 존재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p. 33.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개체들의 본질에 대해 말할 때 아리스토텔레스도 플라톤과 마찬가지로 '에이도스'라는 개념을 여전히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p. 34.
『영혼론』De Anima을 넘겨 보면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가 구체적인 개체들을 이루고 있는 질료들의 조직 원리를 영혼이라고 정의하면서, 이것을 개체들의 본질, 즉 에이도스라고 말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 플라톤에게 영혼은 육체와는 무관한 것으로 불변하는 실체라고 할 수 있지만,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영혼은 개체가 소멸하면 함께 소멸하는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 그들의 뼈와 살은 외적인 상처나 자연적인 수명 증가로 몰라보게 변할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칼리아스는 칼리아스이고, 소크라테스는 소크라테스일 수밖에 없다. 그들에게는 하나의 전체로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본질, 즉 자신만의 에이도스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전쟁으로 팔이 없어졌다고 할지라도 칼리아스는 여전히 칼리아스로 남을 것이다. 나이가 들어서 귀가 잘 들리지 않는다고 해도 소크라테스는 여전히 소크라테스로 남게 될 것이다.
지은이 코멘터리, p. 35.
고대 그리스에서 사물의 본질은 '에이도스'라고 불렸다. 플라톤에게 있어 킬리아스와 소크라테스라는 개체들의 본질은 결국 '인간'이었다. 플라톤에게는 개체의 고유성이 가장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던 셈이다. 반면 경험 세계를 강조했던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 칼리아스의 본질과 소크라테스의 본질은 서로 다른 것이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유는 다음과 같이 간단히 정리될 수 있다. 플라톤에게는 모든 인간들이 인간이라는 하나의 본질을 공유한 것으로 사유되었다면,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모든 인간이 자신만의 고유한 본질을 가진 것으로 이해되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두 사람 모두 '본질'이란 것이 필연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했던 것이 아닐까 ? 서양철학은 니체 Friedrich Nietzsche 혹은 비트겐슈타인 Ludwig Wittgenstein의 등장 이후에야 사물의 '본질'이란 단지 우리 인간의 가치가 투영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통찰에 이르게 된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동양의 사유 전통에서는 본질이란 것이 하나의 언어적 관습에 불과하다는 통찰이 2,000여 년 전부터 이미 상식적인 경해의 하나였다는 점이다. 이것은 과거 동양의 철학자들이 본질이란 것이 얼마만큼 인간의 삶을 억압하는지 이미 성찰했었다는 것으르 말해준다. 자신이 사물들에 본질을 부여했다는 것을 망각하고, 인간과 무관한 절대적인 본질이 있다는 사실에 집착하는 것. 이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 중국의 장자莊子나 인도의 나가르주나Nãgãrjuna가 서양철학자들 가운데 니체 혹은 비트겐슈타인과 비교되곤 했던 것도 다 이유가 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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