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vs철학, 동서양 철학의 모든 것』, 강신주 지음, 그린비, 2010.
# 02. 세계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플라톤 vs 루크레티우스
동서양 우주발생론의 차이, 초월주의와 내재주의
pp. 37-38.
오늘날 우주 발생에 관심을 가진 사람은 물리학자나 천문학자 같은 소수의 전문가들뿐이다. 하지만 근대사회 이전에는 어떤 학문이든 통일적인 전체를 지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궁극적인 지점에는 전체 세계, 즉 우주 탄생에 대한 성찰이 있었다. 이 점은 인간의 삶이 사회를 넘어서 전체 우주 속에서 영위될 수밖에 없다는 통찰 때문이었다. 우주를 알아야 전체 생물의 삶을 이해할 수 있고, 전체 생물의 삶을 알아야 인간의 삶을 이해할 수 있고, 인간의 삶을 알아야 나 자신의 삶을 이해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 서양의 경우 우주발생론의 대표적 사례로 『성경』의 <창세기> Genesis 편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창세기> 편은 신이 우주를 창조하는 이야기를 알려주는데, 오늘날의 우주가 7일간의 신의 작업으로 창조되었다고 설명해 준다. 첫째 날 신은 빛을 만들어 빛과 어둠을 구분하고, 둘째 날 하늘의 모양을 만들며, 셋째 날 바다와 육지 및 초목을 만들고, 넷째 날 해와 달 그리고 별을 창조하며, 다섯째 날 물고기와 새를 만들었다. 그리고 여섯째 날 신은 육지 동물과 지금까지 만든 모든 것들을 다스리는 인간을 함께 창조하였다. 흥미로운 것은 신의 창조 과정에서 보이는 인간의 특권적 지위이다. <창세기> 편에 따르면 신은 자신의 모습을 본떠서 인간을 창조했고, 또한 인간에게 "당을 정복하고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는" 권한을 부여해 주었다. 그리고 마지막 일곱재 날, 지금도 우리가 일요일이라고 해서 일하지 않고 쉬는 일곱째 날, 신은 모든 창조 작업을 마무리하고 휴식을 취하게 된다.
p. 38.
그렇다면 동아시아, 특히 중국의 경우에는 어떤 우주발생론이 최초로 전개되었을까? 중국의 우주발생론은 고대 중국인들의 정치적 관심사를 강하게 반영하고 있다. 최고 통치권자가 천자天子, 즉 '우주의 아들'이라고 불렸던 것만 보아도, 천자가 자신의 아버지인 우주의 모습을 안다는 것은 단순한 지적 호기심을 넘어 일종의 정치적 의무에 해당되는 것이었음을 알수 있다. 전한前漢 시대에 쓰인 『화남자』라는 책에는 동아시아의 전통적 우주발생론의 원형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단서가 일려있다. 이 책의 <천문훈> 편에 따르면 동아시아 우주발생론은 신이라는 개념이 아니라 오히려 기氣라는 개념을 가지고 비로소 전개되기 시작했다.
p. 39.
<천문훈> 편에 따르면 기가 저절로 나누어져서 '하늘과 땅'[天地]을 만들어 낸다. 이어서 하늘은 양陽이라는 기를 분출하고 땅은 음陰이란 기를 분출하여 봄 · 여름 · 가을 · 겨울의 사시四時를 낳게 된다. [...] 하늘과 땅, 음과 양, 그리고 네 계절이 갖추어진 뒤, 이런 조건하에서 마침내 인간을 포함한 만물이 생성된다고 보았다. 사실 여기에서 전개된 우주발생론은 다음과 같은 한마디의 말로 간단히 요약될 수 있다. 모든 것은 기가 모여 발생하고, 기가 흩어지면 다시 사라진다. 이 간단한 우주발생론은 동아시아 형이상학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심장하다.
pp. 39-40.
기독교로 대표되는 서양의 우주발생론과 동아시아의 우주발생론을 함께 살펴보면, 두 문화 전통 사이의 미묘한 차이점을 느낄 수 있다. 우선 기독교의 창조론을 살펴보면, 누구든지 강한 인간중심주의anthropocentricism적 시선을 감지할 수 있다. 특히 인간이 신의 형상을 갖고 있으며, [...] 우리는 인간을 제외한 자연 모두에 대해 아무 거리낌도 없이 자유롭게 전근하고 이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반면 동아시아 전통을 따른다면, 우리는 자신이 다른 생명체에 비해 월등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고 주장할 수 없다. 왜냐면 기氣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인간을 포함한 만물은 모두 동일한 기의 한 가지 양태들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주목해 보아야 할 점은 서양의 우주발생론에서 신이 초월적인 위상을 갖고 있는 반면, 동아시아 우주발생론에서 기는 단지 내재적인 위상을 갖고 있을 뿐이라는 점이다.
[...] 사실 기독교가 유입되기 이전에도 서양에는 내재주의적인 우주발생론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에피쿠로스학파Epicurean school이라고 불리는 이들이 바로 그 주인공들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이 학파의 저술들이 오늘날에는 별로 많이 남아 있지 않다. 서양 사유의 주류를 형성했던 플라톤 철학과 기독교로 상징되는 초월주의가 너무도 힘이 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우리에게는 에피쿠로스학파의 일원이었던 루크레티우스 Lucretius, BC99?~55?가 지은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De rerum natura라는 저술이 남아 있다. [...] 서양 고대철학에서 루크레티우스의 사유는 결국 플라톤에 대한 치밀한 비판으로부터 발생한 것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플라톤 : "우주는 제작자가 형상을 본떠서 만든 것이다."
pp. 41-42.
사실 중세시대까지 플라톤의 저술들 가운데 주저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은 『국가』가 아니라, 현대인들에게는 좀 생소할 수도 있는 작은 텍스트 『티마이오스』Timaios였다. 이 책에는 『성경』, <창세기> 편의 난해한 창조설을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한 가지 실마리를 제공해 주는 플라톤의 우주발생론이 기록되어 있다. 이 때문에 중세 유럽인들은 『티마이오스』에 그렇게도 많은 관심을 표명했던 것이다. [...] 그에 따르면 우주는 다음과 같은 세가지 계기를 원인aitios으로 전제하고 발생했다고 볼 수 있다. 지금은 낯설지만 당시에는 너무도 유명했던 플라톤의 원인론aitiology이 바로 이 과정을 거쳐 탄생하게 되었다. 첫째 계기는 제작자를 의미하는 '데미우르고스'이고, 둘째 계기는 '언제나 같은 상태로 있는 것'으로서 본이 되는 '형상'ēidos이다. 마지막 셋째 계기는 원료를 의미하는 '질료'hylē이다.
pp. 42-43.
서양 중세시대 지성인들이 플라톤의 우주발생론에 '데미우르고스', 즉 '제작자'의 계기가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데미우르고스라는 개념이 아직 기독교를 낯설게 여겼던 당시 유럽인들에게 창조주로서의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설득하는 데 유용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플라톤의 우주발생론과 기독교의 관점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간극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기독교의 신이 모든 것을 창조할 수 있는 것으로 상정된 반면, 플라톤의 데미우르고스는 모든 것을 창조할 수 없다는 사실과 관련되어 있다. 다시 말해 플라톤에게 데미우르고스는 형상과 질료 자체는 창조할 수 없는 존재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 플라톤을 통해서 이제 서양철학은 어떤 사태를 설명할 때 세 가지 주된 원인으로 설명하는 사유패턴을 공유하게 되었다.
p. 43.
'데미우르고스', '형상', '질로'라는 세 가지 원인이 그 이후 칸트 Immanuel Kant 같은 철학자에게서 '이성'reason, '(오성의)범주category', '물자체'thing itself 라는 인식론의 세 가지 계기로 변주되어 반복된다는 사실을 한 가지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 예를 들어 정신분석학 이론가 라캉 Jacques Lacan 사유의 핵심 구조로 등장하는 '상상적인 것'Imaginaire, '상징적인 것'Symbolique, '실재적인 것'Réel도 각각 주체, 법칙, 타자라는 세 요소에 대응하는 것으로 독해될 수 있다. 서양철학이 플라톤 철학의 각주에 불과하다는 화이트헤드의 말은 바로 이 점을 지적하고 있었던 것이다.
루크레티우스 : "원자들의 우발적인 마주침이 우주를 만들었다."
p. 44.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플라톤의 이런 생각을 정면으로 거부했던 철학자가 있었다. 『마주침의 유물론이라는 은밀한 흐름』 Le courtant souterrain du matérialisme de la rencontre에서 알튀세르 Louis Althusser가 그 존재를 부각시키기 전까지 서양철학사에서 비주류로 자리매김되었던 루크레티우스라는 인물이 바로 그 사람이다.
루크레티우스는 제작자 혹은 형상과 같은 초월적 원인들이 미리 선재한다는 생각에 반기를 들었다. 그가 받아들인 유일한 원인은 자발적으로 움직이는 질료들, 정확히 말해 원자들과 그것들의 운동뿐이었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가진 무게라는 속성 때문에 원자들이 허공을 관통해 아래로 떨어질 때, 절대적으로 예견할 수 없는 시간과 장소들에서 그것들은 자신들의 직선 경로로부터 아주 조금, 단지 한 순간의 위치 이동이라고 이야기될 수 있는 작은 정도로, 틀어진다. 만일 그것들이 직선 경로를 벗어나지 않는다면, 모든 원자들은 빗방울처럼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허공을 관통하여 아래로 떨어지게 될 것이며, 일차적 성분들 사이에 어떤 충돌도 벌어지지 않을 것이며, 어떤 타격도 생기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결과적으로 자연은 결코 어떤 것도 만들지 못하게 될 것이다.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p. 45.
루크레티우스는 세계가 형성되기 이전에 원자들이 비처럼 평행으로 떨어지는 상태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평행으로 떨어진다는 조건은 원자들 사이에 어떤 마주침도 없는, 따라서 무의미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만약 원자들이 영원히 평행으로만 떨어진다면, 세계와 만물들은 결코 발생할 수 없을 것이다. 여기서 루크레티우스는 기발한 가설을 하나 제안하게 된다. 어느 순간 이 원자들 가운데 어떤 원자가 평행에서 조금 이탈한 운동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평행으로부터 어긋나는 미세한 차이, 거의 느껴지지도 않을 것 같은 미세한 편차를 루크레티우스는 '클리나멘'Clinamen이라고 이야기한다. [...] 마침내 이러한 일련의 현상들로 인해 거대한 세계가 만들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마치 작은 눈덩이가 다른 눈덩이와 연쇄적으로 계속 마주쳐서 거대한 눈사태를 만들어 내는 것처럼 말이다. 루크레티우스의 우주발생론은 플라톤의 우주발생론이나 기독교의 창조론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p. 46.
루크레티우스에게 있어 제작자나 창조주, 혹은 형상과 같은 선재되니 의미는 전혀 설정될 필요가 없다. 세계는 물질적인 원자들의 우발적인 마주침으로, 그리고 의미는 무의미의 공간 속에서 우연히 생성된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pp. 46-47.
사실 알튀세르가 루크레티우스, 혹은 에피쿠로스학파를 매우 중시했던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알튀세르는 무한한 원자들 사이의 우발적인 마주침이야말로 플라톤과 기독교 사유에 맞설 수 있는 사유, 즉 진정한 유물론에 대한 철학적 기초를 제공할 수 있으리라 확신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최종 표적은 플라톤 철학도 기독교도 결코 아니었다. 그는 역사적 필연성을 주장하는 낡은 역사유물론을 폐기하기 위해 우발적 마주침을 강조했던 것이다. 그에게 있어 낡은 유물론이란 마주침이 발생하는 현실을 무시한 채 선재된 의미 혹은 필연성을 강조하는, 가장 위험한 적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 맑스는 이 모든 것을 분명히 몇 마디 암시 속에서이긴 하지만, 그가 우리에게 돈 많은 사람과 벌거벗은 노동력의 '마주침'des Vorgefundene에 대해 그토록 자주 말할 때, 그의 정식 속에서 말하고 있다. 『마주침의 유물론이라는 은밀한 흐름』
지은이 코멘터리, p. 49.
플라톤은 우리가 경험하는 사물에는 이미 어떤 본질 혹은 의미가 내재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사물에는 그것을 만든 제작자가 부여한 필연적 의미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반면 루크레티우스는 세계나 사물이 만들어지기 전에 의미나 본질이 미리 존재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한다. 아이가 태어난 다음에야 그 아이에게 이름이 붙는 것처럼, 원자들의 우발적인 마주침으로 사물이 형성된 뒤에야 그것에 대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결국 플라톤은 사물에 앞서 의미가 미리 존재한다는 입장을 취했던 반면, 루크레티우스는 의미의 사후성이라는 입장을 강하게 옹호했다고 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두 사람의 세계관을 받아들였을 때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삶의 태도가 확연히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플라톤을 따른다면, 우리는 자신이나 사물들 이면에 숨겨져 있는 의미를 찾는 탐구자가 될 것이다. 반면 루크레티우스를 따른다면 우리는 새로운 마주침, 혹은 새로운 세계를 꿈꿀 수 있는 여행을 지속해야만 할 것이다. [...]
'Art & Photo > Review - expo & book'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북리뷰] 『담론』, 신영복 - # 02. 사실과 진실 - # 03. 방랑하는 예술가 (0) | 2022.02.18 |
---|---|
[북리뷰] 『담론』, 신영복 - # 01. 가장 먼 여행 (0) | 2022.02.04 |
[북리뷰] 『철학 vs 철학』# 04. 보편자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아퀴나스 vs 오컴 (0) | 2022.01.16 |
[북리뷰] 『철학 vs 철학』# 03. 행복한 삶을 이루기 위한 방법은 무엇인가? : 에피쿠로스학파 vs 스토아학파 (0) | 2022.01.14 |
[북리뷰] 『철학 vs 철학』, 강신주 지음 # 01. 사물의 본질이란 무엇인가? : 플라톤 vs 아리스토텔레스 (0) | 2022.01.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