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vs철학, 동서양 철학의 모든 것』, 강신주 지음, 그린비, 2010.
# 04. 보편자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아퀴나스 vs 오컴
실재론과 유명론의 정치적 속내
p. 67.
서양 중세철학 전통에서 실재론 realism과 유명론 nominalism을 가름하는 핵심적인 관건은 개별 사물 res과 보편자 universals 사이의 관계 설정 문제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다"라는 명제를 예로 들어 보자.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가 가리키는 구체적인 사물이 개별 사물이라면, '인간'이라는 추상명사가 바로 보편자이다. 실재론에 따르면 보편자는 개별적 '사물에 앞서서' ante res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다. 반면 유명론에 따르면 보편자는 개별적 '사물 뒤에서' post res 인간이 만든 이름에 불과한 것, 다시 말해 단지 '인간 정신 속에만' in mente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실재론적 경향이 개별 사물보다 보편자를 더 중시한다면, 유명론적 경향은 결국 보편자보다는 개별 사물을 중시하게 된다.
pp. 67-68.
이 대목에서 실재론이란 용어와 관련된 오해 하나를 살펴보도록 하자. 서양 중세철학에서는 실재론이 유명론과 반대되는 사유 경향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근대철학에서의 실재론은 물질적 대상들이 인식 주체 바깥에 객관적으로 그리고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보는 사유 경향을 가리킨다. 따라서 근대철학에서의 실재론은 유명론과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관념론 idealism과 대립되는 것이다. 관념론은 어떤 물질적 대상이나 외부 물체들도 우리의 인식이나 의식을 떠나서는 존재하지 못한다고 보는 관점이다. 이에 비해 근대철학의 실재론은 이러한 대상 혹은 물체들이 우리 의식과 관계없이 외부에 존재한다고 가정한다. 따라서 결과적으로 보면 매우 아이러니한 현상이지만, 중세철학의 실재론은 오히려 근대철학의 관념론과 연결되고, 이와 반대로 중세철학의 유명론은 결국 근대철학의 실재론과 유사한 것으로 서로 연결될 수 있다.
p. 68.
중세의 실재론과 근대의 관념론이 정치경제학적으로 볼 때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면, 중세의 유명론과 근대의 실재론은 매우 진보적인 관점을 견지했었다는 점이다. 실재론을 적극 옹호했던 아퀴나스 Thomas Aquinas, 1225?~1274는 사유재산을 직접 자연권으로 인정해 자식들에게 물려주는 것을 긍정했지만, 반대로 유명론을 지지했던 오컴 William of Ockham, 1285?~1349은 인간에게는 사유재산이나 공동재산이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아퀴나스에 따르면 보편자가 개체 앞에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유재산이란 것도 아직 태어나지 않았지만 태어날 자신의 자식 앞에 미리 존재하는 것으로 인정될 수 있는 것이었다. 이와 달리 오컴의 입장에 따르면 보편자가 개체 앞에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유재산은 태어날 자식 앞에 미리 존재할 수는 없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 때문에 오컴은 굶주린 자들이 결국 어느 때에 이르러 기존의 사유재산 질서를 파괴할 수도 있다고 보는 혁명적 입장을 피력하게 된 것이다.
아퀴나스 : "보편자는 마음 바깥에 실재하는 것이다."
p. 70.
플라톤의 우주발생론은 기독교가 서양에 들어오면서 많은 변형을 겪는다. 그는 우주가 세 가지 원인, 즉 데미우르고스demiurgos라는 작용인, 에이도스(이데아)라는 형상인, 무한정자라는 질료인의 결합으로 만들어진다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기독교는 세계가 유일하고 절대적인 신에 의해 '무로부터ex nihilo 창조되었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무로부터의 창조론'이다. 존재론적으로 기독교는 신 안에 플라톤이 말한 세 가지 원인을 모두 수렴시킬 수밖에 없었다. 기독교의 신, 즉 하나님 외부에 그 자신이 창조하지 않은 질료가 있다고 한다면, 이는 절대자이자 무한자로서의 하나님을 상대적이고 유한한 존재로 만들어 버릴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퀴나스가 '무로부터의 창조론'을 그토록 논증하려 애썼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p. 71.
어떤 장인이 나무나 청동이라는 원료를 가지고 어떤 조각상을 만든다고 해보자. 여기서 장인이 작용인이고 나무나 청동이 질료인이라면, 장인의 머릿속에 있는 조각상의 모델이 곧 형상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경우 장인은 나무나 청동이라는 질료의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기독교도로서 아퀴나스는 자신이 숭배하는 절대적 하나님이 이처럼 질료의 제약을 받는 존재라는 사실을 결코 허용할 수 없었다. [...] 그에게 있어 "존재자들 중 존재 전체의 보편적 원인인 하느님으로부터 존재하게 되지 않는 것이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 아퀴나스는 논리적 증명을 제안했다기보다는 오히려 하나의 신학적 가정을 믿으라고 주장하고 있는 셈이다.
p. 72.
아퀴나스는 이렇게 주장한다. 사람 자체, 사자 자체, 해바리가 자체, 장미 자체, 아름다움 자체, 정의 자체 등 이 수많은 이데아들은 하나님의 정신 안에 미리 존재하고 있었다고 말이다. 바로 이런 이데아라는 모형들을 통해 하나님은 이 세계의 만물들을 창조했다는 것이다. 아퀴나스가 이야기하는 이데아들은 플라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지만 기본적으로 보편자로서 기능하는 것들이다. [...]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결국 모든 개별자들은 보편자 다음에 오는 것이지, 보편자들에 앞서 존재할 수는 없는 것이다. [...] 이제 아퀴나스가 주장했던 실재론을 매우 단순하게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보편자들은 바로 신의 마음속에 모두 미리 존재하고 있었다고 말이다.
오컴 : "보편자는 인간의 정신 속에만 존재한다."
pp. 72-73.
서양의 중세철학은 고대 그리스철학의 이성 ratio과 기독교의 신앙 fides을 중재하려는 시도의 결과, 어찌 보면 '사생아'로 탄생한 비극적인 철학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성적이고 논리적이었던 유럽인들을 기독교 신앙으로 이끌기 위해서 초기 기독교 사상가들은 불가피하게 이성과 논리에 호소할 수밖에 없었다. [...] 이러한 중세철학의 속앓이를 한방에 날려 버리면서 당당히 신앙의 길로 나아간 신학자가 바로 다름아닌 오컴이었다.
p. 74.
오컴은 모든 구체적인 사물들이 미리 존재하는 보편자들, 즉 이데아들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아퀴나스의 입장을 전면으로 거부하고 있다. 사실 고대 그리스철학에서 빌려온 이데아, 즉 에이도스는 기독교 신앙을 이성적으로 설득하려는 중세철학의 고뇌를 대변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 그래서 오컴이 이데아를 부정했을 때 그는 중세철학의 파국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나님 아버지라는 말이 있듯이, 오컴은 모든 개별자들, 즉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독자적인 대상들"이 직접적으로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것들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니까 에이도스로 상징되는 보편자는 신의 창조에 조금도 개입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던 셈이다.
심지어 그는 독자적인 대상들이 독자적인 대상으로 현존하는 것 자체도 하나님의 전능에 의해 가능한 것이라고 설명하기까지 한다. 예를 들어 지금 눈앞에 장미가 피어 있다면, 그것도 결국 하나님의 힘에 의해 가능해졌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창조에만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된 개체들의 생존에도 직접적으로 개입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오컴은 하나님의 전능을 강조했던 것이다. 만약 개체들의 창조에만 개입하고 그들의 삶에는 관여할 수 없다면, 하나님의 전능은 훼손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p. 75.
그렇다면 현실적으로 우리가 사용하는 보편자라는 개념, 예를 들어 인간, 장미, 정의, 아름다움 등은 어떻게 존재하는 것일까? 오컴은 보편자들이 신의 정신 속에 있는 것으로 우리가 발견해야만 하는 것들이 아니라, 단지 우리 정신 가운데 존재하는 것일 뿐이라고 이야기한다. 유명한 오컴의 유명론은 이렇게 해서 탄생했던 것이다.
나는 보편자가 주체 속에, 정신의 내부나 외부 가운데 어느 곳에 존재하는 실제적인 것은 아니지만, 오직 정신 속에서 사유의 대상으로서만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 이런 경우는 비유하자면 예술가의 행위와 비슷할 것이다. 왜냐하면 마치 정신 외부의 집 또는 건물을 본 예술가가 우선 그 정신 속에 어떤 유사한 집을 그린 다음에 이후 그 처음 집과 오직 수적으로만 구별되는 유사한 집을 현실 속에서도 만들어 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경우에도 밖에서 무엇인가를 본 것으로부터 얻게 된 정신 속의 그림이 이후 하나의 본으로 작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정리집』(Ordinatio)
그의 『정리집』 다른 대목을 살펴보면 오컴이 '직관적 인식'과 '추상적 인식'을 구분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직관적 인식이 내 앞에 현존하는 사물이나 사건, 혹은 자신의 내면 상태를 직접적으로 인식하는 것이라면, 추상적 인식은 내 앞에 현존하지 않는 사물이나 사건, 혹은 나의 내면에 벌어지지 않은 상태를 인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p. 76.
그렇다면 결국 오컴이 말한 보편자들은 직관적 인식을 기초로 추상적 인식을 통해 만들어진 것으로, 우리 정신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된다. [...] 오컴의 지적이 타당하다면 보편자가 실재한다는 아퀴나스의 주장은, 인간의 정신 속에만 존재하는 보편자를 오만하게도 하나님의 정신 속에 투영한 것에 지나지 않게 된다. 유명한 '오컴의 면도날'은 바로 이런 그의 관점과 연관된 것이다. "다수성은 필연성 없이 설정되어서는 안 된다." 여기서의 다수성은 물론 보편자의 다수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인간의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다양한 보편자들로 세계의 사물들을 불필요하게 분류하고, 나아가 이런 보편자들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는 인간 이성의 오만에 대한 일종의 경고성 발언이라고도 이해할 수 있겠다. 오컴에게 있어 진정으로 존재하는 것은 오직 신과 개체들뿐이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그는 전지전능하신 신의 위상과 능력이 온전하게 잘 이해될 수 있다고 보았다.
지은이 코멘터리, p. 76.
아퀴나스에게 신은 이성적인 창조자였다. 다시 말해 신이 합리적으로, 어떤 법칙을 가지고 세계를 창조했다고 본 것이다. 이 때문에 우리는 사물들의 본질이나 질서를 탐구함으로써 신의 뜻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오컴은 신이 이성의 지배를 받는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에게 신은 절대적인 그리고 무조건적인 창조자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토사쿠팽이라는 표현이 떠오른다. 토끼를 사냥했으면 필요 없는 사냥개는 삶아 먹는다는 말이다. 마침내 중세 기독교는 이제 고대 그리스철학이라는 사냥개가 불필요하다고 느끼게 되었다. 이는 이제 기독교가 충분히 유럽인들의 심성에 각인되었다는 자신감의 또 다른 표현일 것이다. 이런 흐름 속에서 마침내 오컴과 그의 추종자들이 중세 말기의 대학을 지배했다. 이것은 물론 이성과 신앙을 조화시키려고 했던 아퀴나스의 시대가 저물었다는 것을 상징하는 사건이기도 했다. 오컴의 추종자들은 아퀴나스로 대표되는 기존 신학 전통을 "낡은 길"(via antiqua)이라고 조롱하면서 자신들의 방법을 '새로운 길'(via moderna)로 자랑하곤 했다. 흥미로운 점은 오컴이 닦았던 새로운 길이 글자 그대로 근대철학(modern philosophy)의 선구가 되었다는 점이다. 오컴이 '직관적 인식'을 강조하였을 때 그 조짐이 이미 분명히 드러나고 있었다. 내 눈앞에 현존하는 개체들을 강조하던 그의 정신은 로크(John Locke), 흄(David Hume), 버클리(George Berkeley)의 경험론적 사유 경향으로, 그리고 내면 상태에 대한 확실성을 강조한 그의 정신은 코기토(cogito)와 신을 둘러싼 데카르트(René Descartees)의 방법론적 회의로 그대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역으로 말해 이것은 서양의 근대철학이 한편으로는 신으로부터 독립된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 오히려 전지전능한 오컴의 신이 모든 것들을 여전히 내려다보고 있다는 것을 말해 주기도 한다. 겉으로는 더 이상 신을 이야기하지 않지만, 아직도 웬만한 서양철학자들 저서 속에 오컴의 신이 냄새를 풍기는 것도 다 이유가 있다고 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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