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vs철학, 동서양 철학의 모든 것』, 강신주 지음, 그린비, 2010.
# 05. 인간은 만물의 영장인가?
데카르트 vs 파스칼
인문학의 탄생이 가지는 의미
pp. 79-80.
신이 세계를 지배하면 인간은 더 행복해질 수 있을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종교적 가르침이 현실에 실현되지 않는 것에 대해 깊은 아쉬움을 토로하곤 한다. 하지만 그들은 실제로 신의 이름으로 세계가 지배되었던 시대가 이미 있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서양의 중세시대이다. 사실 중세시대는 종교의 시대였다고 불릴 수 있을 만큼 신앙과 믿음이 강조된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사랑과 은총으로 넘쳤던 시대라기보다 오히려 신의 이름으로 자행된 억압과 살육의 시기였다고 볼 수 있다. 중세시대의 또 다른 별명이 '암흑시대'Dark Ages인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물론 중세 기독교가 남긴 근본적 상처가 사실 신 때문은 아니라는 변명을 늘어놓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중세시대가 암흑으로 덮였던 진정한 이유는 신 때문이 아니라, 신의 말을 곡해해서 그것을 맹종했던 인간들 때문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
14세기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르네상스Renaissance 운동은 바로 암흑시대에 빛을 가져오는 서막이라고 할 수 있었다. 글자 그대로 르네상스는 '다시 태어남'을 의미하는데, 다시 태어난 주체는 다름 아닌 '인간' 자신이었다. 마침내 신과 그것의 본성을 다루는 신학 대신, 인간다움Humanity과 그것을 숙고하는 인문학the humanities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정신이 중세시대 기독교의 세계관을 뚫고 새롭게 부활한 셈이다. 르네상스 시대 이후, 서양 근대사회의 인문학은 인간을 넘어서는 일체의 초월적 가치들에 대해 회의적인 자세와 비판적 태도를 견지하게 된다. 그 초월적 가치가 종교든, 정치권력이든, 아니면 자연의 힘이든 관계없이 말이다.
pp. 80-81.
그렇다면 인문학적 정신을 갖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그것은 일체의 초월적 가치에 대해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면서, 삶에서 마주치는 다양한 타자와 관계하려는 정신을 의미한다. 인문학적 정신의 소유자는 타자를 통해서만 행복할 수 있고 또한 반대로 타자를 행복하게 만들 수도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물론 그는 타인이 나에게 건네주는 표현을 통해 상대방의 속내를 해독할 수 있는 인문학적 감수성을 갖추고 있어야만 한다. 그래서 '휴머니티'humanity라는 말의 번역어이지만 인문人文이란 말의 표현이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이 말은 타자가 드러내는 문양 혹은 글이라는 의미이다. 사실 인문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타자의 표현을 통해 그의 속내를 읽어 내는 방법을 배운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우리가 평소에 많은 문학작품과 철학 작품, 다양한 에술 작품들을 접해 보는 것이 이러한 배움에 도움이 된다. 그것을 통해 우리는 어느 작가, 어느 철학자, 그리고 어느 예술가의 고유한 속앓이와 울분을 공유하는 연습의 시간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p. 82.
아무튼 서양 근대철학은 르네상스가 새롭게 부각시킨 인문학적 정신의 총화라고 할 수 있다. 근대철학에는 신을 중심으로 전개되던 사유 대신 인간을 중심으로 모든 것을 숙고하려는 근대의 정신이 잘 응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대목에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는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의 명제가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다. 중세시대로부터 자명하다고 생각되던 모든 지식 체계를 인간을 중심으로 재편하기 위해서, 데카르트는 확고부동한 중심 혹은 그 토대를 다시 세우려고 시도했다. 데카르트가 생각했던 토대는 바로 인간 자신이었다. 물론 데카르트에게 있어 인간의 모든 측면이 토대가 될 수는 없었다. 그의 의도에 따르면 모든 것을 의심하고 새롭게 생각할 수 있는 인간의 이성만이 오직 진정한 토대가 될 수 있는 자격을 가지고 있었다. 데카르트는 이렇게 생각했다. 통용되는 진리들을 모두 의심할 수 있지만, 의심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진 나의 생각 자체에 대해서는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다고. 마침내 중세시대의 모든 지식들을 해체해서 다시 쌓아 올릴 수 있는 확고한 토대로서 코기토, 혹은 인간 이성이 이렇게 해서 그 탄생을 알리게 된 것이다.
데카르트 : "인간은 자신을 반성할 수 있는 이성적인 존재이다."
pp. 82-83.
데카르트를 이해하고자 할 때 우리는 두 명의 데카르트가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한 명은 『방법서설』Discours de la méthode에 등장하는 '실존적인 데카르트'이고, 다른 한 명은 『성찰』Meditationes de prima philosophia에 등장하는 '추상화된 데카르트'이다. 중요한 것은 전자가 없었다면, 사실 후자도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방법서설』에 등장하는 '실존적인 데카르트'는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이라는 낯선 곳, 당시 가장 코스모폴리탄적인 도시에 머물렀다. 이곳에 거주하면서 그는 프랑스에 있는 동안 자신이 참이라고 생각했던 대부분의 것들이 사실은 프랑스 내에서만 통용되던 협소한 것이라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다시 말해 자신이 참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특수한 것일 뿐 보편적인 것은 아니라는 점을 절감하게 된 것이다.
우리에게 확신을 주는 것은 확실한 인식이 아니라 관습이라는 선례라는 점, 더욱이 그럼에도 좀처럼 발견하기 힘든 진리에 대해서는 그 발견자가 한 국민 전체라기보다 단 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훨씬 더 진실한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에, 그것에 동의하는 사람이 많다고 해서 그 진리성이 유효하게 증명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방법서설』
만약 데카르트가 프랑스라는 한정된 곳에만 계속 머물러 있었다면, 낯선 곳에서 회의하게 되는 '실존적인 데카르트'는 기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따라서 『성찰』에 등장하는 사유 주체로서의 데카르트는 바로 이 '실존적인 데카르트'로부터 논리적으로 재구성된 '추상화된 데카르트'였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데카르트는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발견해 낸 코기토가 단순히 자신의 경험에 국한된 것일 수 있다는 점을 심각하게 고려하지는 않았다. 만약 당시 그가 암스테르담이 아니라 조선이란 나라에 왔다면, 아마도 그가 회의했던 내용이다 그것을 통해 시롭게 구성된 코기토 역시 상당히 다른 면모를 띠었을 것이다. 결국 데카르트는 암스테르담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특정한 성격의 코기토를 모든 인간들에게 적용하려고 시도하게 된다.
pp. 84-84.
데카르트에게 양식은 그의 말대로 "참된 것을 거짓된 것에서 구별하는 능력", 즉 이성을 의미했다. 그는 모든 인간이 양식, 즉 이성을 천부적으로 갖추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분명 대다수 인간이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을 구분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무엇이 참이고 거짓인지 묻는 질문에 사람들은 모두 동일한 대답을 내놓을까? 자신이 속한 시공간적인 공동체의 차이에 따라 사람들은 진리에 대해 전혀 다른 입장을 표명할 것이다. 사실 이 때문에 여러 공동체의 성원들이 서로 대립하고 갈등하는 것이 아닌가? 여성이 남성적 질서에 항상 복종하는 것이 참된 행동이라고 간주한 시절이 있었다면, 그와 달리 남성에 대한 여성의 복종이 거짓된 행위라고 비판하는 시절도 있었다. 데카르트는 바로 이 점을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데카르트로부터 시작되는 근대철학이 이성에 대한 특유의 낙관주의를 피력하고 있다고 좀더 엄격하게 평가할 필요가 있다.
한편 『병법서설』에서 그 단초를 살짝 보인 데카르트는 이제 『성찰』에 이르러 방법론적 회의를 통해 합리적이고 보편적인 양식, 혹은 이성을 '코기토'라는 개념으로 정당화하려고 시도했다. 수학적 진리를 포함한 거의 모든 것을 의심할 수 있는 사유 주체로서 코기토는 가장 순수한 양식, 혹은 가장 순수한 이성이라고 할 수 있을 만한 것이었다.
'나는 있다. 나는 현존한다'ego sum, ego existo. 이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얼마동안? 내가 사유하는 동안이다. 왜냐하면 내가 사유하기를 멈추자마자 존재하는 것도 멈출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나는 필연적으로 참이 아닌 것은 아무것도 인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정확히 말해 단지 하나의 사유하는 것, 즉 정신, 영혼, 지성 혹은 이성인데, 나는 이 용어의 의미를 전에는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참된 것이며, 참으로 현존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것일까? 나는 말한다, 바로 사유하는 것이라고. 『성찰』
p. 86.
데카르트가 말한 이성은 무엇인가를 의심할 때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의심할 때만큼 인간의 생각이 왕성하게 작동하는 경우도 없을 테니 말이다. 사실 의심만큼 인간이 이성적인 존재라는 것을 보증해 주는 것도 별로 없을 것이다. 의심한다는 것은 참이라고 통용되는 진리에 다시 근거를 요구하는 것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의심한다는 것은 내가 지금까지 참이라고 믿고 있던 것이 진정으로 참일 수 있는지 근거를 찾는 것을 의미한다. 이 점에서 이성reason이란 말이 가진 함의는 매우 시사적이다. 'reason'이란 단어는 인간이 가진 추리 능력뿐만 아니라 '이유'나 '근거' 혹은 '이유 대기'의 능력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이성은 '이유를 댈 수 있는 능력'이라고 정의될 수 있다. 물론 참과 거짓을 구분하는 이유나 근거가 데카르트의 생각처럼 명확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심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데카르트가 중요한 이유는 바로 그를 통해서 인간이 자율적이고 합리적인 존재로 분명하게 격상되었기 때문이다.
파스칼 : "인간은 허영을 가진 심정의 존재이다."
pp. 86-87.
데카르트를 포함한 많은 철학자들은 인간을 합리적인 존재라고 주장해 왔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과 믿음 역시 인간의 자기중심적인 생각이나 소박한 소망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과거에 살았던 인간들을 되돌아보아도, 아니면 지금 이 시대를 함께 살고 있는 인간들을 살펴보아도, 우리는 인간이 합리적인 존재라는 주장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를 그리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인간은 합리적이거나 이성적이기보다 오히려 권태, 탐욕, 잔인, 자만, 허영으로 가득 차 있는 존재에 가까워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인간을 낙관했던 데카르트의 순진함을 조롱하면서 인간의 적나라한 모습을 응시했던 철학자가 곧 나타났던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 모르겠다. 그가 바로 파스칼Blaise Pascal, 1623~1662이었다. 파스칼은 코기토와 같은 추상적인 사유 주체가 아니라 화장품 냄새 혹은 잔인한 피 냄새가 풍기는 현실적 인간을 응시하려고 했다. 이런 맥락에서 파스칼은 데카르트와 달리 우리의 마음에는 이성raison 보다는 오히려 심정cœur이 강하게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게 된다. 바로 이 심정의 측면에서 현실적 인간의 모습을 엿보려고 했던 것이다.
심정은 이성이 모르는 자신만의 이유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수많은 일에서 이것을 알 수 있다. 심정은 자기가 열중하는 데 따라서 자연적으로 보편적 존재l'être universel를, 아니면 자연적으로 자기 자신soi-même을 사랑하게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이 선택하는 데 따라 전자 또는 후자에 대해 냉담해진다. 당신은 전자를 버리고 후자를 선택했다. 당신이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과연 이성에 의해서인가? 『팡세』(Pensées)
pp. 88-89.
한편 우리는 기독교를 옹호하려는 파스칼의 또 다른 종교적 태도를 감지할 수도 있다. 신에 대한 사랑 역시 이성에 의지하기보다 자신의 심정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도출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가 보았을 때 당시 사람들은 무한자로서의 신을 사랑하기보다 덧없이 사라질 유한한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에 더욱 여념이 없었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타인으로부터 사랑을 받으려고도 할 것이다. 어느 순간 미모, 건강, 부유함, 권력 등으로 인해 사람들은 자기 외의 다른 타인들로부터 사랑과 관심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덧없는 인간이 가진 이런 일시적인 것들이 얼마나 오래 지속될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신이 아름답다고, 건강하다고, 부유하다고, 정치적 영향력이 있다고 착각한다. 바로 여기서 인간의 내면에 깊이 뿌리를 내린 허영vanity의 단초를 살필 수 있다.
허영은 사람의 마음속에 너무도 깊이 뿌리박혀 있는 것이라서 병사도, 아랫것들도, 요리사도, 인부도 자기를 자랑하고 찬양해 줄 사람들을 원한다. 심지어 철학자들도 자신의 찬양자를 갖기를 원한다. 이것을 반박해서 글을 쓰는 사람들도 훌륭히 썼다는 영예를 얻고 싶어 한다. 이것을 읽는 사람들은 읽었다는 영광을 얻고 싶어 한다. 그리고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나 자신도 아마 그런 바람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다. 또한 이것을 읽을 사람들도 아마 그러할 것이다. 『팡세』
p. 90.
데카르트가 인간이 가진 선천적인 양식으로서의 이성을 긍정했던 근대철학의 여명기에, 파스칼은 자신을 포함한 모든 인간이 무의식적인 허영의 노예라는 사실을 토로했던 것이다. 물론 파스칼은 이렇게까지 주장하기도 한다. 바로 이와 같은 고질적인 인간의 허영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신을 필요로 한다고 말이다.
지은이 코멘터리, p. 91.
이성적인 사유 주체, 즉 '코기토'를 발견한 데카르트는 근대철학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타당한 평가이다. 데카르트의 코기토는 바로 중세적 질서로부터 벗어난 자유로운, 하지만 동시에 고독한 도시인들의 내면을 반영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근대 대도시 사람들의 내면에 대한 짐멜(Georg Simmel)의 통찰, 즉 기분이나 정서적 관계에 의존했던 중세적 삶에 비해 근대 "대도시의 정신적 삶은 지적 성격을 더 강하게 띤다"라는 통찰은 매우 시사적이다. 데카르트의 코기토에는 대도시의 번잡함, 주체의 고독함, 타자에 대한 지적인 반응 등 다양한 도시적 계기들이 함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데카르트의 후광에 가려 파스칼은 종종 에세이나 썼던 사람으로 기억되곤 한다. 하지만 여러 면에서 볼 때 파스칼은 오히려 데카르트보다 더 심오한 성격을 갖는다. 그것은 그가 근대사회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는 데카르트가 인간을 과대평가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인간은 결코 지적이지 않다. 그가 보았을 때 동시대 인간들은 허영, 비참, 부조리로 점철된 삶을 영위하고 있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파스칼이 기독교의 신을 다시 살려내려고 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이런 비루하고 부조리한 삶의 조건에 있어 만약 신마저 없다고 한다면 인간은 얼마나 더 참담하겠냐는 것이다. 자신의 주저 『팡세』 후반부에서 파스칼이 신에 매달렸던 것에도 어느 정도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흥미로운 것은 인간의 자발적인 사유 능력을 강조한 데카르트의 전통, 그리고 이와 반대로 인간의 비자발적인 삶의 양상을 응시했던 파스칼의 전통이 현대에 와서도 그대로 반복된다는 점이다. 『데카르트적 성찰』(Cartesianische Meditation)에서 후설(Edmund Husserl)은 다시 한번 인간의 자발적인 사유 능력을 강조했고, 『파스칼적 성찰』(Méditations Pascaliennes)에서 부르디외(Pierre Bourdieu)는 인간의 무의식적인 아비투스(habitus), 즉 허영이라는 비합리적인 습관적 체계를 분석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아직도 서양은 데카르트와 파스칼이 열어 놓은 근대철학의 지평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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