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Art & Photo/Review - expo & book

[북리뷰] 『담론』, 신영복 - # 07. 점은 선이 되지 못하고 - # 08. 잠들지 않는 강물

by aTELIER 민석킴 2022. 3. 6.

『담론』, 신영복 지음, 돌베개, 2015.

 

 

# 07. 점은 선이 되지 못하고


pp. 106-107.

『맹자』는 7편 261장, 3만 5천 자 가량 됩니다. 『논어』의 3배 가까운 분량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만 뽑았습니다. 곡속장穀觫章의 '이양역지以羊易之' 부분입니다. 양羊과 소를 바꾼 이야기입니다. 이 글을 뽑은 이유는 역시 우리 강의의 주제인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위해서입니다. 『주역』의 관계론 독법, 『논어』의 화동 담론, 그리고 『맹자』의 '만남'입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맹자가 인자하기로 소문난 제나라 선왕을 찾아가서 자기가 들은 소문을 확인합니다. 소문은 이런 것입니다. 선왕이 소를 끌고 지나가는 신하에게 묻습니다. "그 소를 어디로 끌고 가느냐?" "혼종하러 갑니다." 혼종이란 종을 새로 주조하면 소를 죽여서 목에서 나오는 피를 종에 바르는 의식입니다. 소는 제물로 끌려가고 있었던 것이지요. 아마 소가 벌벌 떨면서 눈물으르 흘렸던가 봅니다. 임금이 "그 소 놓아주어라"고 합니다. 신하가 "그렇다면 혼종을 폐지할까요?" "혼종이야 어찌 폐지할 수 있겠느냐. 양으로 바꾸어서 제를 지내라"고 했다는 소문이었습니다. 요컨데 소를 양으로 바꾸라고(以羊易之) 지시한 적이 있는가를 확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하자, 왜 바꾸라고 하셨는지 그 이유를 묻습니다. 벌벌 떨면서 죄 없이 사지로 끌려가는 소가 불쌍해서 바꾸라고 했다는 것이었습다. 그럼 양은 불쌍하지 않습니까? 양도 불쌍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백성들의 험담처럼 큰 것을 작은 것으로 바꾼 인색함 때문이 아니었던 것 역시 분명합니다. 맹자는 선왕 자신도 모르고 있는 이유를 이야기해 줍니다.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까?
     소를 양으로 바꾼 이유는 양은 보지 못했고 소는 보았기 때문이라는 것이 맹자의 해석이었습니다. 우리가 『맹자』의 이 대목에서 생각하자는 것은 '본 것'과 '못 본 것'의 엄청난 차이에 관한 것입니다. 생사가 갈리는 차이입니다. 본다는 것은 만남입니다. 보고, 만나고, 서로 아는, 이를테면 '관계'가 있는 것과 관계 없는 것의 엄청난 차이에 대해서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이 곡속장이 바로 그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옛 선비들이 푸줏간을 멀리한 까닭은 그 비명 소리를 들으면 차마 그 고기를 먹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p. 108.

인간관계는 사회의 본질입니다. 사회에 대한 정의가 많지만, 사회의 본질은 '인간관계의 지속적 질서'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근대사회, 자본주의 사회, 상품사회의 인간관계는 대단히 왜소합니다. 인간관계가 지속적이지 않습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도시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도시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의 삶을 돌이켜보면 인간적 만남이 대단히 빈약합니다. 이양역지를 통해서 확인하려고 하는 것이 바로 우리 시대의 인간관계과 사회성의 실상입니다.

 

p. 109.

모스크바의 지하철에서는 전혀 다른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노인이 탑승하자 청년들이 얼른 일어서서 자기 자리로 모셔 앉히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 세 번 그런 광경을 목격하고 현지 교민에세 물어보았습니다. 대답은 "당연한 일이지요!"였습니다. "이 전철을 저 노인들이 건설했다"는 것이었습니다. 혁명적 열정으로 청춘을 바쳐 건설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대학의 학생들은 다른 대답이었습니다. 노인들이 건설한 것은 맞지만 그것은 월급을 받기 위해서 일한 것이라는 대답이었습니다. 그것 역시 당연한 대답이었습니다. 문제는 같은 사안이 전혀 다른 맥락에서 읽히는 이유입니다. 세대 간의 만남도 단절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 이유에 대하여 우리가 고민해야 합니다.

 

# 08. 잠들지 않는 강물


pp. 123-124.

나는 노자 사상의 핵심이 '무유론'無有論이라고 생각합니다. 『노자』 1장이 바로 무유론입니다. 지금 이야기한 이 11장에서도 역시 무無를 귀하게 여기는 귀무론貴無論을 펼치고 있습니다. [...] 찰흙을 잘 반죽해서 [...] 그릇으로 만드는데 [...], 그 비어있음으로 해서 즉 그릇의 속이 비어있음으로 해서, [...] 그릇으로서의 쓰임이 생긴다. 그 비어 있음 즉 '없음'이 그릇을 유용한 것으로 만들어 준다는 뜻입니다. 이어지는 문장도 같은 구조입니다. [...] 문과 창문을 뚫어서, [...] 방으로 만드는데 [...], 그 없음으로 해서 방으로서의 쓰임이 생긴다. 물건으로 가늑 찬 방은 방으로서의 쓰임이 없습니다. 이 장의 결론은 "유有가 이로움이 되는 것은 무無가 쓰임이 되기 때문이다"입니다. 無란 그냥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의 '근본'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인지하지 못할 뿐입니다. 세상은 무無와 유有가 절묘하게 조화되어 있는 질서라는 것이 노자의 생각입니다. 그 無의 최대치가 바로 자연입니다.

 

p. 124.

노자』 1장은 도道와 명名에 관한 설명으로 잘못 읽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개념으로서의 도와 명이란 왜소한 것이며 근본은 무無라는 선언입니다. 무와 유는 이름만 다를 뿐 같은 것입니다. 무無로써 관기묘觀其妙, 그 오묘한 것을 보아야 하고, 유有로써 관기요觀其徼, 드러난 것을 보아야 합니다. 1장의 핵심이 바로 무유론無有論입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와 보이는 세계를 통합적으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노자』는 유와 무를 통일시킴으로써 우리의 왜소한 사유를 확장합니다. 우리의 강의에서 계속해서 강조하는 세계 인식의 확장이 바로 이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는 무가 개념화되고 가시화된 것입니다. 큰 것이 다만 작게 나타났을 뿐입니다. 우리말의 '없다'는 '업다'에서 나온 것이라고 합니다. 아기를 등에 업고 있으면 일단 없습니다.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무유론 교육을 받았습니다. 엄마가 아기들과 하는 '까꿍' 놀이가 그것입니다. 없던 엄마가 갑자기 까꿍! 하고 문 뒤에서 나타납니다. 아기는 '없다'와 '있다'를 함께 생각합니다. 숨바꼭질 놀이도 같은 것입니다. 무유론이 노자 철학의 핵심인 이유를 깨달아야 합니다.

 

p. 127.

대변약눌大辯若訥도 같은 뜻입니다. 최고의 언변言辯은 마치 말을 더듬는 듯하다고 합니다. 눌訥은 말 더듬는다는 뜻입니다. 말을 잘한다는 것은 듣는 사람이 신뢰하게끔 하는 것이 최고입니다. 화려한 언어를 동원하거나 청산유수로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자기의 말을 진정성 있게 받아들이게 하는 경우가 대변大辯임은 물론입니다. 왕필은 자기가 지어내는 일이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뜻을 자기 그릇에 담어서 건네지 않고 상대방의 그릇에 담는 것입니다. 이단을 만들어 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더듬는다는 것은 말을 줄인다는 뜻입니다. 전에도 이야기했듯이 언어는 작은 그릇입니다. 작은 그릇에 담으면 뜻이 작아지게 마련입니다. 기형도는 '소리의 뼈'가 '침묵'이라고 했습니다. 침묵이 훨씬 더 많은 말을 합니다. 노자 철학은 미학, 윤리학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있습니다.

 

pp. 130-131.

『노자』 강의를 무위상선약수 두 가지만 하자고 했습니다. 이어서 ''[水]입니다. 『노자』의 물을 읽는 까닭은 그것이 우리 시대에 요청되는 『노자』 독법이기 때문입니다. 고전을 오늘날의 과제와 연결해서 읽는 것에 대해서 실증주의자들은 큰일 나는 것처럼 얘기합니다. 그러나 당시의 실제에 대해서는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노자의 실제 인물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릅니다. 머리가 하얗게 센 80세 노인의 모습으로 태어나서 노자라고 했다고 합니다. 모든 고전은 과거와 현재가 넘나드는 곳입니다. 실제와 상상력, 현실과 이상이 넘나드는 역동적 공간이어야 합니다. 유가의 발전 사관과 진進의 신념도 후기 근대사회의 자본축적 양식이 과연 지속 가능한가라는 관점에서 재조명되어야 합니다. 모든 텍스트는 새롭게 읽혀야 합니다. 필자는 죽고 독자는 꾸준히 탄생합니다. 『노자』에 대한 다른 견해가 많습니다만 우리 시대의 과제를 조명하는 독법이 먼저라고 생각합니다.
     '상선약수' 장이 바로 이 문제에 관한 해명이 되기도 할 것입니다. 상선약수란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는 뜻입니다. 최고의 선상선上善은 지금가지 논의한 바와 같이 자연이고 道입니다. 그러나 자연이나 도는 보이지 않습니다. 무無입니다. 굳이 '물'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도무수유道無水有, 도는 보이지 않고 보이는 것 중에서 도와 가장 비슷한 것이 바로 물이기 때문입니다. 이 장은 물을 예로 들어서 도를 설명합니다. 우리가 사람을 물로 보는 건 심하게 낮춰 보는 것입니다. 그것도 매우 시사적입니다. 노자를 물의 철학자, 민초의 사상가라고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pp. 133-134.

노자가 강물최고의 선이라고 하는 이유는 세 가지입니다. 첫째 수선리만물水善利萬物입니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기 때문입니다. 더 설명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물이 곧 생명입니다. 둘째 부쟁不爭입니다. 다투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은 다투지 않습니다. 유수부쟁선流水不爭先, 흐르는 물은 선두를 다투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산이 가로막으면 돌아가고 큰 바위를 만나면 몸을 나누어 지나갑니다. 웅덩이를 만나면 다 채우고 난 다음 뒷물을 기다려 앞으로 나아갑니다. 절대로 무리하지 않습니다. 爭의 뜻은 戰과 다릅니다. 전戰은 한일 축구 대항전처럼 적과 맞서서 싸우는 것입니다. 쟁爭은 무리하게 일을 추진할 때 일어나는 갈등을 의미합니다.戰은 피할 수 없는 것이지만 爭은 방법의 문제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조정이 가능합니다. 물이 흘러가는 모양이 부쟁不爭의 전형입니다. 노자가 이야기하는 위무위爲無爲가 바로 부쟁입니다. 셋째 처중인지소오處衆人之所惡입니다. 모든 사람이 싫어하는 곳에 처하기 때문에 상선上善입니다. 싫어하는 곳이란 낮은 곳, 소외된 곳입니다. 물은 높은 곳으로 흐르는 법이 없습니다. 반드시 낮은 곳으로 흐릅니다.
     이 세 가지 이유로 노자는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의 가장 낮은 곳'이라는 뜻에 대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이 구절에 근거하여 『노자』를 민초의 정치학이라고 합니다. 가장 약하고 낮은 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민초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먹이사슬의 최말단에 처해 있습니다. 전쟁에 동원되어 죽고, 포로가 되어 노예가 되고, 만리장성의 축조에 동원됩니다. 고향을 잃고 가족들과 헤어져야 합니다. 노자의 물은 이처럼 민초의 얼굴입니다. 『노자』에는 , 그리고 민초가 같은 개념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처럼 약하고 부드러운 물이 강한 것을 이긴다는 유능제강柔能制剛의 메시지를 선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제왕을 이긴다는 민초의 정치학입니다. 민초에게 희망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물은 궁극적으로는 '바다'가 됩니다. 바다는 가장 큰 물입니다. 그리고 어떠한 것도 대적할 수 없는 압도적 위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위력은 가장 낮은 곳에서 모든 시내를 다 받아들이기 때문에 생깁니다. 그래서 이름이 '바다'입니다. 물은 '하방연대'下方連帶의 교훈입니다.

 

p. 135.

강의 첫 시간에도 이야기했습니다만, 나는 자주 사람을 두 종류로 대별합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보다 강한 사람에게 당당하고 자기보다 약한 사람에게 관대한 사람과 반대로 자기보다 강한 사람에게 비굴하고 자기보다 약한 사람에게 오만한 사람입니다. 이 두 종류의 사람밖에 없다고 합니다. 주변 사람들을 잘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다른 조합은 없습니다. 강한 사람한테 비굴하지만 약한 사람한테 관용적인 사람은 없습니다. 원칙 없이 좌충우돌하는 사람은 있을지 모르지만. 연대는 위로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추종이고 영합일 뿐입니다. 연대는 물처럼 낮은 곳과 하는 것입니다. 잠들지 않는 강물이 되어 바다에 이르는 것입니다. 바다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p. 137.

     끝으로 당부하고 싶은 것은 연대는 전략이 아니라 삶의 철학이라는 사실입니다. 산다는 것은 사람과의 만남입니다. 그리고 사람들과의 만남이 연대입니다. 관계론의 실천적 버전이 연대입니다.

    『노자』는 민초의 희망이며 평화의 선포라고 해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 시대의 올바른 『노자』 독법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노자』를 '무유론​'無有論과 '상선약수'만으로 읽는 것이 아쉽습니다. 여러분이 더 읽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