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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리뷰] 『철학 vs 철학』# 06. 국가는 정당한 것인가? : 홉스 VS 클라스트르

by aTELIER 민석킴 2022. 3. 20.

『철학vs철학, 동서양 철학의 모든 것』, 강신주 지음, 그린비, 2010.

 

# 06. 국가는 정당한 것인가?

홉스 vs 클라스트르


절대주의와 아나키즘 사이에서

pp. 93-94.

관례적으로 국가와 주권을 신적인 권위로 정당화하는 논리를 절대주의absolutism이라고 부른다. 국가나 주권이 신적인 존재와 같이 절대적인 것이라고 간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절대주의의 입장을 따를 때 인간은 국가나 주권을 결코 의심하거나 회의할 수조차 없다. 르네상스 이후 서양 근대사회는 신의 초월적 권위가 약화되고 그만큼 인간과 인간이 가진 이성적 능력에 강한 신뢰를 보내게 된다. 이제 주권자나 그가 통치하는 국가를 신과 같은 절대자로 정당화하는 논리는 힘을 상실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근대사회의 국가주의 철학자들은 국가나 주권자를 정당화하는 새로운 논리를 다시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이들은 국가의 권위를 더 이상 신에 빗대지 못하고, 이제는 스스로 사유하고 자신의 행동을 결정할 수 있는 인간 개체들에 근거해 국가의 정당성을 논증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 대목에서 의미심장하게 등장했던 것이 바로 사회계약론theory of social contract이다. 사회계약론은 사실 데카르트의 코기토와 함께 근대철학의 성격을 규정하는 두 가지 중요한 원리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사회계약론이 중요한 이유는 이 논의가 민주주의라는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하는 중요한 논리적 근거로 작동해 왔기 때문이다.

 

pp. 94-95.

로크John Locke가 자신의 주저 『통치에 대한 두 가지 논고』Two Treatises of Gouvernment에서 언급하려고 했던 것도 바로 이 문제였다. 그에 따르면 국가의 목적은 개인의 자연적인 권리인 자유와 평등을 실현하고 보장하는 데 있다. 그렇다면 국가나 주권자는 그 자체가 더 이상 신성한 목적이 아니라, 단지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실현시키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표면적으로 볼 때 근대철학에 들어와서 국가와 주권은 자유로운 개인들의 목적 추구를 위한 단순한 수단으로 전략한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루소Jean-Jacques Rousseau의 논의를 함께 살펴보면 국가와 주권은 수단이기는 하지만 결코 함부로 폐기할 수 없는 절대적인 수단이라는 미묘한 성격을 점유하고 있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그렇다면 명목으로만 수단일 뿐, 사회계약론을 옹호하던 철학자들에게 있어서도 국가는 여전히 신성불가침성을 가진 것으로 이해되었다고 볼 수 있다. 국가가 절대적인 수단이란 주장은 사실 그것이 절대적인 목적이라는 생각과 거의 다를 바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개인들의 자유로운 선택과 합의에 의해 국가와 주권이 정당화되었다면, 원칙적으로 개인들의 새로운 선택과 합의에 의해 국가와 주권의 논리 자체도 다시 폐기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사회계약론자들은 결코 그쪽 방향으로는 논의를 진행시키지 않았다. 바쿠닌Mikhail Bakunin이나 크로포트킨Pyotr Kropotkin이 외롭게 외쳤던 무정부주의, 즉 아나키즘Anarchism이 의미를 갖는 것도 바로 이 대목에서이다. 그들은 국가가 인간의 자유로운 삶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원칙적 입장을 일관되게 추구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만약 구성원들이 원하지 않는다면 국가의 어떠한 측면도 다시 변경되거나 혹은 폐지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개인도 이러한 의문을 공개적으로 제기하면서 국가의 법률적 강제력에 저항할 수 없다는 것을 어린아이도 이해할 수 있다.

 

홉스 : "국가는 문명사회의 상징이다."

pp. 98-99.

사회계약론에 입각해서 국가를 정당화하려고 했던 최초의 근대철학자는 홉스Thomas Hobbes, 1588~1679였다. 자신의 주저 『리바이어던』Leviathan에서 그는 '자연상태' 및 '국가권력'과 관련된 흥미로운 논증을 제안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자연상태의 인간들은 자신과 자신의 재산을 외부의 강력한 위협으로부터 보존하려는 본능적인 욕망을 가지고 있다. 그의 논의에서 중요한 것은 자신을 보호하려는 인간의 욕망에 기본적으로 타인에 대한 강한 불신이 깔려 있다는 점이다. 스스로 타인과 그의 재산을 약탈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다짐하더라도, 우리는 타인도 나와 같은 다짐을 하리라고 확신할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상태는 홉스에게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혹은 '전쟁상태'에 다름 아닌 것이라고 이해되었던 것이다. 상호 불신과 선제공격으로 점철될 수밖에 없는 자연상태에서 인간은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의 소유물들을 보존하기 어렵게 된다. 홉스는 바로 이 상황으로부터 모든 갈등과 대립을 종식시켜 줄 공통적 권위, 즉 주권에 대한 필요성을 절감했다. 『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바다 괴물 리바이어던으로 묘사된 국가가 탄생하게 된 것은 바로 이런 과정을 통해서였다. [...]
     홉스에 의하면 '자연상태'의 공포를 해소하기 위해서 개인들은 상호계약을 맺어 자신들의 권력을 한 곳으로 모아 주게 되었다. 그는 이것이 바로 리바이어던, 즉 국가가 탄생한 근본적 이유라고 설명한다. [...] 하지만 과연 홉스의 전망은 생각대로 이루어졌을까? 불행히도 역사는 그렇지 않다는 점을 잘 말해 주고 있다. 절대주권 자체가 오히려 자신에게 권력을 양도한 개인들의 자기 보존 욕망을 억누르고 억압해 왔기 때문이다. 개인과 개인 사이의 갈등은 절대주권의 공권력에 의해서 줄어들 수도 있다. 하지만 절대주권 사이에서 진행되는 갈등은 대규모 절멸 전쟁으로 치달으면서 자연상태에서 이루어졌던 개인 사이의 갈등보다 더 참혹하고 비참한 결과를 낳고 있다. [...] 과연 이것이 홉스가 말한 자기 보존의 진정한 상태라고 말할 수 있을까? 모든 인간이 자신의 고유한 의사와 관계없이 국가의 철저한 지배를 받는 상태가 곧 인간의 문명 상태라고 볼 수 있을까?

 

p. 100.

     사실 사회계약론의 입장에서 국가를 정당화하는 홉스의 논리에는 철학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하나 도사리고 있다. 과연 인간이 자신의 권력, 즉 힘을 다른 사람에게 양도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하는 의문이 바로 그것이다. 자신을 보호하고 자신의 삶의 방향을 온전히 결정할 수 있는 힘이라는 점에서, 자유로운 개인의 권력은 원칙적으로 어떤 타인에게도 결코 양도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권력을 주권자에게 양도하는 순간, 우리는 삶의 주체가 아닌 주권자의 노예로 전략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독일 사람들이 히틀러를 압도적인 지지를 통해 주권자로 선출했던 사건을 생각해 보자. 그들은 자신의 권력을 히틀러에게 몰아주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히틀러는 자신이 가진 주권을 전쟁을 일으키고 유태인을 학살하는 데 사용한다. 과연 독일 사람들은 전쟁과 학살을 진정으로 원해서 히틀러를 선출했던 것일까? 물론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정해진 임기동안 그 누구도 히틀러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그들은 히틀러에게 자신의 모든 권력을 계약에 의해 합법적으로 양도했기 때문이다.

 

클라스트르 : "국가는 문명이 아닌 야만적 상태이다."

pp. 100-101.

홉스가 국가를 정당화하는 방법은 단순하다. 즉 개인들은 자신의 삶을 타인들의 공격과 위협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국가와 주권자를 만들기로 서로 약속했다는 것이다. 그의 논증이 타당하려면 우선 모든 사람들이 정말 서로 합의를 해서 국가를 만들었는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또한 홉스가 말한 국가 없는 상태, 즉 자연상태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 자연상태는 홉스에 따르면 자신의 생명조차 유지하기 힘들 정도로 극도의 야만적 상태여야만 한다. 그래야 강제력과 공권력을 가진 국가의 탄생이 정당화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과연 국가가 없는 인간 사회는 야만적인 사회였을까? 이런 의문은 우리를 클라스트르Pierre Clastres, 1934-1977이라는 정치인류학자의 통찰에로 이끌어 준다. 그에 따르면 오늘날과 같은 국가 형식이 존재하지 않던 인디언 사회는 야만사회가 아니라 고대의 문명사회였으며, 이 점에서 볼 때 오히려 진정한 야만사회는 오늘날 우리가 몸담고 있는 국가사회라고 볼 수 있다. 클라스트르로부터 우리는 국가나 권력이 가혹한 야만의 상징이며, 동시에 그것이 인간의 자유와는 서로 양립 불가능하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pp. 102-103.

     클라스트르의 보고에 따르면 인디언들은 독립적인 자유인으로 인정받기 위해서 잔혹할 정도의 통과의례를 거쳐야만 한다. 예를 들어 어느 부족에서는 통과의례를 집행하는 사람이 통과의례를 거치는 젊은이의 어깨나 가슴살을 1인치 이상 잡아당겨 칼로 그 살을 뚫기도 했다. 이 경우 그 젊은이는 비명을 지르거나 신음 소리를 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되면, 그 젊은이는 의례를 통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통과의례에서의 비명은 그가 작은 고통마저도 감당하지 못한다는 것, 따라서 인디언 사회의 자유로운 성원이 되기에 아직 부적합한 사람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인디언 사회에서 독립적인 성원으로 인정받게 된 모든 사람들은 예외 없이 누구나 통과의례의 상처를 몸에 지니게 된다. [..
     오랜 의문과 분석을 통해 마침내 클라스트르 인디언 사회의 한 가지 핵심적인 비밀을 알아차리게 된다. 무엇보다도 먼저 그가 주목했던 것은 인디언들이 국가로 대표되는 권력 관계나 차별 관계를 '문명'의 현상으로 간주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들에게 국가라는 것은 억압되어야 할 '자연', 눌러서 억제해야 할 인간의 탐욕스런 본능 혹은 권력욕을 나타내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었다. 그들에게 있어 진정한 '문명'이란 것은 어떤 차별도 존재하지 않는 독립적인 자유인들의 공동체로 사유되었다. 결국 이 과정을 통해 클라스트르는 인디언들의 통과의례가 '자연'으로부터 '문명'으로의 이행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행위라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었다. 자신의 살속으로 칼이 깊숙이 뚫고 들어올 때 그들이 어떤 신음 소리도 내지 않았던 것은 '문명인'으로서 살아가겠다는 데 대한 강렬한 도의어였던 셈이다. 그들의 생각에 따르면 몸메 본능적인 탐욕과 권력욕이 배어들이 않게 하려면, 타인을 얕보고 무시하며 궁극적으로는 노예로 삼고자 하는 야만스런 심성이 생기지 않도록 하려면, 누구나 반드시 이런 엄청난 고통의 경험을 겪어야만 한다. 억누르고 있었던 권력욕이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올 때마다, 인디언들은 자신의 살에 새겨진 흉터, 그리고 몸에 각인된 고통스러웠던 기억을 떠올리며 마음을 잡으려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단호한 얼굴로 다시 진정한 문명인으로 남겠다는 각오를 다지게 된다. "나는 권력의 욕망을 지니지 않을 것이고, 복종의 욕망도 지니지 않을 것이다!"

 

pp. 103-104.

'국가에 대항했던' 인디언 사회에 대한 통찰을 통해 이제 클라스트르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묻고 있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지배하고 약한 자가 강한 자에게 복종하는 약육강식의 세계에 살고 있다면, 인간을 동물로부터 구별할 수 있는 근거는 과연 어디에 있는가? 약육강식의 '경쟁' 논리에 따르면은 결국 동물들과 한 치도 다를 바 없는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이 동물이 아니라 진정한 인간으로 성장하려면, 인간은 강한 사람에게 복종하지도 않고 약한 자를 지배하려고도 하지 않는 자유인의 의지, 그리고 이와 아울러 자신을 죽일 수는 있어도 자신의 자유를 빼앗지는 못할 것이라는 확고한 용기를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 이 점에서 클라스트르가 찾아가 보았던 인디언들의 사회는, 아주 오래된 사회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문명이 발달했던 사회였던 셈이다. 오늘날 우리가 국가 체제에서 흔히 엿볼 수 있는 권위적 지배와 복종이라는 야만적 상태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사회가 바로 그들의 공동체였기 때문이다. 바로 이 때문에 인디언 사회는 여전히 우리에게 '오래된 미래'로 남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지은이 코멘터리, p. 105.

 

중세사회로부터 근대사회로 급변하던 시기는 국가 문제를 사유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해 준다고 할 수 있다. 이 급변기에 신을 정점으로 이루어졌던 국가 질서가 여지없이 붕괴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이 시기에 국가를 정당화하는 논의들이 모두 예외 없이 사회계약론이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점에서 로크도 그리고 홉스도 결코 예외는 아니었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자유로운 개인들이 자발적으로 자신의 권리를 주권자에게 양도한다고 이해했다. 물론 홉스의 말대로 그 순간 자유로운 개인들은 주권자의 지배를 받는 '국민'으로 전락하게 될 뿐이다. 바로 이 순간이 '자발저인 복종'이라는 환각이 발생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사회계약론이 하나의 진리인 것처럼 통용되던 시절, 그것이 단지 하나의 허구에 불과하다고 공격했던 또 다른 철학자가 있었다. 그가 바로 스코틀랜드 출신의 경험론자 데이비드 흄(David Hume)이다. 그의 논문 『원초적 계약에 대하여』(Of the Original Contracts)가 중요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짧은 논문에서 은 인간이 결코 자유롭게 계약을 맺기 어렵다는 사실을 '가난한 농민들과 장인들'의 사례를 들어 설명한다. 다른 지역으로 떠나서는 결코 살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은 어떤 계약이든 달게 수용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다는 것이다. 만약 진정으로 사회계약이 가능하려면, 모든 사람들이 자유롭게 주어진 국가나 사회를 떠나서 살 수 있어야만 한다. 이 점이 바로 으로 하여금 당시 유행하던 다양한 사회계약론들을 허구에 불과한 것으로 공격하게 했던 핵심적인 근거였다. 나아가 그는 인간이 어떤 사회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비자발적이라는 사실도 덧붙이고 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어떤 국가나 사회를 자율적으로 선택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 주어진 국가나 사회에 맹목적으로 던져지면서 훈육되는 존재일 뿐이라는 말이다. 흄의 지적이 타당하다면 우리는 자유롭게 자신들이 몸담을 공동체를 선택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경제적 비참함이 극복되지 않을 경우 이러한 부자유의 상태는 영원히 지속될 수밖에 없다.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클라스트르의 통찰로부터 큰 힘을 얻을 수 있다. 그는 우리에게 아주 오랫동안 인류가 경제적으로 곤궁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자유로운 분배를 할 수 있다는 어설픈 주장이 있다. 하지만 이런 논리는 결국 어떠한 빵도 나누어 주지 않겠다는 탐욕스러움의 표출에 지나지 않는다. 나누려는 의지는 빵이 커진다고 해서 갑자기 생기는 것이 결고 아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