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Art & Photo/Review - expo & book

[북리뷰] 『철학 vs 철학』# 07. 타자와의 소통은 가능한가? : 스피노자 VS 라이프니츠

by aTELIER 민석킴 2022. 4. 1.

『철학vs철학, 동서양 철학의 모든 것』, 강신주 지음, 그린비, 2010.

 

# 07. 타자와의 소통은 가능한가?

스피노자 vs 라이프니츠


근대철학의 맹점, 타자

pp. 107-108.

데카르트 René Descartes는 근대철학의 시작을 알리는 서막이었다. 그리고 그 서막의 핵심부에는 모든 것을 의심하는 사유 주체, 즉 코기토 cogito가 존재한다. 흥미로운 점은 코기토의 발견이라는 일대 사건이 암스테르담이라는 자유 도시를 떠나서는 생각될 수 없는 것이었다는 점이다. 당시 암스테르담은 신이 지배하던 중세시대로부터 가장 멀리 벗어나 있던 자유 도시였다. 모든 도시 생활이 그렇듯이 암스테르담에서의 생활은 데카르트에게 필요한 익명성을 보장해 줄 수 있었다. 자신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도시인들은 타인의 사유와 행동에 대부분 무관심하기 마련이다. 새로운 사유를 꿈꾸던 데카르트에게 암스테르담이 편안한 안식처가 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번화한 암스테르담 거리, 그 누구도 신경을 쓸 필요 없는 대도시의 생활은 데카르트에게 자유의 분위기와 동시에 고독을 함께 주었다. 어쩌면 데카르트의 코기토에서 자유로운 주체라는 느낌과 동시에 고독의 아우라가 함께 느껴지는 것도 당연한 일인지 모르겠다. 이 대목에서 1903년에 출간된 짐멜 Georg Simmel의 유명한 논문 『대도시와 정신적 삶』 The Metropolis and Mental Life에 등장하는 한 구절을 읽어 보도록 하자.
좀더 정신적이고 세련된 의미에서 대도시인은 사소한 일들과 편견들에 얽매이는 소도시인들에 비해 '자유롭다'. 대도시와 같이 큰 집단이 가진 지적인 삶의 조건들이나 상호 무관심이나 속내 감추기라는 태도를 가장 강하게 느끼는 것은, 개인의 자립성이 훼손되곤 하는 작은 집단에 속한 개인들이라기보다는 대도시처럼 인구가 극도로 밀집한 곳에서 살고 있는 개인들일 것이다. 이는 신체적 거리의 가까움과 공간의 협소함이야말로 정신적 거리를 가장 잘 드러내 주기 때문이다. 대도시의 우글거리는 군중들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외로움과 쓸쓸함을 가장 강하게 느끼기 마련이다. 물론 이것은 위에서 말한 자유의 이면일 따름이다. 대도시만큼 한 개인이 누릴 수 있는 자유가 반드시 거의 정서적 안정으로 나타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가장 잘 드러내 주는 곳도 없기 때문이다. 『대도시와 정신적 삶』

 

pp. 109-110.

     앞서 근대철학의 서막을 알렸다는 점에서 코기토의 발견이 매우 의미심장하다고 했는데, 이는 신의 명령에 무반성적으로 따르던 인간이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주체로 서게 되는 확고한 터전을 얻었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신의 시대가 저물고 인간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것처럼 코기토고독한 사유 주체를 의미한다. 코기토에게 확실한 것은 단지 자신이 생각하는 바로 그 순간, 생각 자체는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코기토를 발견하자마자 동시에 타자도 발견할 수밖에 없게 된다는 점이다. 우리는 자신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혹은 자신이 어떤 감정을 갖고 있는지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생각하는 주체, 즉 다음 아닌 코기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타자 역시 나름의 코기토를 가진 존재라는 점이다. 타자 본인은 자신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스스로는 분명히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우리는 타자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확실히 알 수 없다. 이는 내가 타자가 아니기 때문에 발생하는 자연스런 현상이다. 내가 자유로운 사유 주체이듯, 타자도 자유로운 사유 주체일 수밖에 없다. 타자가 나와는 전혀 다른 생각, 전혀 다른 선택, 전혀 다른 행동을 하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매우 귀찮고 불편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타자와 단절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인간은 혼자 힘으로 자신의 삶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어려운 유한한 존재니까 말이다. 어찌 보면 데카르트코기토를 발견하자마자, 근대철학계가 타자와의 소통이란 문제를 떠안게 된 것도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p. 110.

     정치철학적으로 홉스 Thomas Hobbes나 루소 Jean-Jacques Rousseau 등이 사회계약의 문제를 논의하게 된 것도 이와 유사한 이유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타자가 원하는 것, 혹은 생각하는 것이 나와는 전혀 다를 수 있기 때문에 계약을 통해서 나와 타자 사이의 차이를 해소해야 한다고 보는 논리가 이들에게도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스피노자 : "기쁨과 슬픔은 타자와 소통할 수 있는 통로이다."

p. 111.

암스테르담에서 데카르트고독한 '사유'의 주체를 발견했다면, 스피노자는 고독한 '삶'의 주체를 발견하게 된다. 스피노자에게 삶의 주체란 자신의 삶을 유쾌하고 즐겁게 증신시키려는 의지, 즉 코나투스 conatus를 가진 주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사실 이것은 인간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사물들은 "자신의 존재 안에서 지속하고자 노력하는 코나투스"를 "현실적 본질"로 모두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정신과 육체를 이원론적으로 파악했던 데카르트와는 달리 스피노자코나투스 개념을 통해 이제 정신과 육체를 통일적으로 설명하려고 시도한다.

 

pp. 112-114.

     여기서 핵심적인 문제는 스피노자에게 있어 코나투스나 충동, 혹은 욕망이 먼저이고 의식적인 판단은 그 다음에 온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그의 말대로 "우리는 그것을 선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에 그것을 향하여 노력하고 의지하며 충동을 느끼고 욕구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거꾸로 우리는 "노력하고 의지하며 충동을 느끼고 욕구하기 때문에 어떤 것을 선이라고 판단한다". 이처럼 사유보다는 욕망에 우선성을 부여하면서 스피노자데카르트로부터 상당히 멀리 벗어나게 된다. 데카르트의식적인 판단 혹은 사유가 우선적이고 의지나 욕망은 그 다음에나 가능한 것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사유하는 것이란 무엇인가? 의심하고, 이해하며, 긍정하고, 부정하며, 의욕하고, 의욕하지 않으며, 상상하고, 감각하는 것이다." 『성찰』에 나도는 데카르트의 말을 통해 이 점을 잘 엿볼 수 있다.
     또 하나의 중요한 점은 스피노자에게 있어 인간을 포함한 모든 사물들이 가지고 있는 코나투스가 불변하는 실체와 같은 것이 결코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타자와 우발적으로 마주치면서 증가하거나 혹은 감소될 수 있는 역동적인 힘이었다. 이제 직접 스피노자의 말을 통해 그의 속내를 살펴보도록 하자. [...]
    [...]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인간이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큰 변화를 받는다"는 스피노자의 생각이다. 고독하고 폐쇄된 사유 영역에서 벗어나 스피노자인간의 현실적 경험으로부터 자신의 사유를 전개하고 있다. 유한자로서 인간은 타자와 어떤 식으로든지 마주칠 수밖에 없고, 그로부터 싫든 좋든 어떤 자극을 받게 된다. 당연히 이런 자극은 인간의 정신과 육체에 모종의 변화를 초래할 것이다. 스피노자는 타자와 마주쳤을 때 주체의 내면에 발생할 수 있는 변화를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원초적 감정 상태로 정리한다. 기쁨의 감정과 슬픔의 감정이 바로 그것이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정신과 신체를 포함한 인간의 삶에서 기쁨의 감정이 쾌감이나 유쾌함이라고 규정될 수 있다면, 슬픔의 감정은 고통이나 우울함이라고 표현될 수 있다.

 

p. 114.

인간은 자신의 코나투스가 증진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다시 말해 자신의 삶에 기쁨과 유쾌함을 가져다주는 타자와의 소통과 연대를 끈덕지게 도모하고 유지해야 한다.

 

 

라이프니츠 : "타자와의 소통은 불가능하며 동시에 불필요하다."

p. 115.

데카르트고독한 사유 주체를 발견하자마다 근대철학에서는 타자와의 소통이란 문제가 전면으로 대두되었다고 했다. 스피노자가 중요한 이유는 그가 삶에의 의지, 즉 코나투스라는 개념을 통해 소통의 가능성을 진지하게 숙고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스피노자와 함게 데카르트 이후 유럽 근대철학계를 양분한 라이프니츠라는 철학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스피노자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타자와의 소통 문제를 해명하려고 했다. 소통이라는 문제를 풀어 가는 라이프니츠의 방식은 재기발랄하고 심지어는 기발하다는 인상마저 풍긴다. 그는 우리가 타자와 소통할 수도 없고, 동시에 소통할 필요도 없는 존재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만드는 내용이다.

 

p. 116.

     라이프니츠를 잘 모르는 사람도 '창이 없는 모나도' windowless monad라는 유명한 표현에 대해서는 어디선가 한번쯤 들어 보았을 것이다. 이것은 글자 그대로 우리와 타자 사이에는 소통할 수 있는 '창'과 같은 통로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창이 없는 모나드'라는 표현은 현대인들의 독한 삶을 묘사하는 수식어로 자주 쓰이곤 한다. 그렇지만 오늘도 우리는 누군가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고,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기도 하며, 누군가를 미워하기도 하지 않는가? 만약 라이프니츠의 말대로 우리에게 타자에로 열려 있는 창이 전혀 없다면, 이런 일들은 도대체 어떻게 해서 발생하는 것일까?

 

p. 118.

라이프니츠는 우리가 타자와 소통할 수도 없고, 동시에 소통할 필요도 없는 존재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타자와의 사이에서 생길 수 있는 모든 행복과 불행은 새롭게 혹은 우연히 발생한 것이 결코 아니라, 우리가 탄생할 때부터 모두 신이 예정해 놓은 것이 질서에 의해 하나씩 실현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지은이 코멘터리, p. 119.

 

데카르트는 고독한 사유 주체, 즉 '코기토'를 발견했다. 이것은 결국 인간이 유한하다는 사실에 대한 발견과 동일한 것이기도 했다. 사실 유한성의 발견은 항상 어떤 외부성의 발견과 동시적으로 진행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계가 있다는 말은 바깥이 있다는 말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이 문제로부터 근대철학의 속앓이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어떻게 하면 유한자로서 인간은 외부와 관련을 맺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우리는 타자와 적절한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 [...] 스피노자기쁨의 원리를 제안한다. 타자와 마주쳤을 때 '기쁨'을 느낀다면 우리는 그 타자와의 관계를 지속해야만 한다. 반대로 타자와 마주쳤을 때 기쁨을 느끼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타자와의 관계를 지속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스피노자 특유의 기쁨의 윤리학이 시작되고 있다. 반면 라이프니츠타자와의 관계나 무관계는 모두 사전에 신에 의해 예정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신은 모든 개체들에게 자신을 제외한 전체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잠재성을 부여했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가 누군가와 처음 만나 관계를 지속한다고 해도, 이것은 우리의 자유로운 결정에 의해서가 결코 아니라고 보았다. 단지 구체적인 삶에서 신이 부여한 관계의 한 가지 잠재성이 지금 실현되고 있을 뿐이라고 본 것이다. [...] 결국 스피노자가 '관계의 외재성(externality)'이라는 테마를 따르고 있다면, 라이프니츠는 '관계의 내재성(internality)'이란 테마를 취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우리는 타자와 마주쳤을 때 기쁠지 혹은 그렇지 않을지를 사전에 미리 결정할 수 없다. 반면 라이프니츠에게 있어 기쁨의 관계든 혹은 슬픔의 관계든 그것은 모두 내재화된 관계가 실현되어 드러난 것에 불과한 것이다. 스피노자의 생각이 옳은가? 라이프니츠의 생각이 옳은가? 중요한 것은 두 사람의 생각 중 어느 것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세계를 이해하는 우리의 입장과 삶을 영위하는 우리의 태도가 천양지차로 달라질 것이라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