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술과 아방가르드의 중심지 ]
글쓴이 민석킴 Minseok KIM
#04
예술과 아방가르드의 중심지
이런 다양한 맥락 아래에서, 이 같은 요소들의 종합은 당시의 예술가들에게 하여금 이 도시 파리의 매력에 저항할 수 없게 했다. 셰루 Clement Chéroux 의 표현에 따르면, 파리는 « 사실상 예술의 수도였고, 모든 창작의 활력을 끌어당기는 빛의 도시였다(1) ». 그리고 프랑수아즈 드누옐 François Denoyelle 은 파리가 « 서구 세계의 예술적 영향력에 있어 중심 중에 중심인 것이 확실해졌다(2) »고 묘사 하기도 한다. 그렇게 전 세계의 예술가들이 파리로 모여들고, 그 다양한 국적이 문화 정체성의 비옥함을 가져왔으며, 그것은 창작의 활기와 동기 그리고 소재 등으로 작용했다. 그러므로 이 장의 목적은 그 결집은 어떤 특징을 갖는지, 도시 안에서도 그 활동의 중심이 되었던 곳은 어디였는지 그리고 당시 주목 할 만한 예술의 경향은 무엇이었는지 등을 살펴보는 것이다.
1. 파리로 모여드는 예술가들
게다가 파리를 예술의 수도라고 부를 수 있었던 이 순간에, 이 도시에는 다양한 국적의 예술가들이 집중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러 문화의 혼합, 그것이 이 결집의 가장 주요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특히 양차 세계대전 사이의 기간 동안 사진 분야에서 그 특징이 인상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 배경에는 앞서 살펴본 일반 맥락들 이외에도 사진기술의 비약적 발전, 사진 예술을 둘러싼 다양한 담론의 형성 그리고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의 사진 사용 등도 고려되어야 한다. 이러한 경향에 대한 클레망 셰루 Clément Chéroux 의 자세한 분석에 따르면, 20 년대 초반에서 후반까지 순서대로 미국과 러시아를 중심으로 한 첫번째 이동이 있었고 – 만 레이 Man Ray 와 베르니스 아보트 Bernice Abbott, 이어서 루마니아와 헝가리 – 브라사이 Brassaï 와 앙드레 케르테즈 André Kertész, 그리고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의 유입 – 제르만 크룰 Germaine Krull 과 라울 오스만 Raoul Hausmann 등을 확인할 수 있다(3). 특히 이 시기, 동유럽과 독일에서 파리로 들어오는 이민의 물결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해체와 히틀러 정권의 집권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기도 하다. 이렇게, 수많은 외국인 예술가가 파리에 유입되었다. 양차 세계대전 사이의 사진들을 주로 수집하는 수집가 크리스티앙 부케레 Christian Bouqueret 의 컬렉션에 의하면, 당시 활동한 사진가의 약 40 프로가 외국인이었던 것으로 나타난다(4).
2. 초현실주의 출현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다음의 예술 사조에 그 시기와 순서에 대한 명확한 기준을 설정하는 것은 힘들다. 그러나 더욱 근본적인 것을 생각하지 않아서는 안된다. 그것은 19 세기 낭만주의 쇠퇴에 이은 사실주의, 인상주의, 표현주의, 아방가르드와 다다이즘으로 이어지는 경향들 그리고 초현실주의의 출현 등이 모두 이 도시를 그 활동 배경으로 하거나 적어도 막대한 영향 아래 있다는 점이다. 앞서 살펴본 몇몇 역사적 맥락의 파도가 그 흐름을 야기하고, 나아가 그 결과, 파리가 더욱더 예술의 중심지로서 그 지위를 공고히 하는 원인이 된다. 그 중에서도 특히, 20년대의 파리에서 그룹의 리더라고 할 수 있는 앙드레 브르통 André Breton 이 첫 번째 『초현실주의 선언 』 Manifeste du surréalisme(5) 을 발표하면서, 예술의 중심지로서의 도시 영향력을 가속화하는 새로운 예술운동들이 등장하게 된다. 브르통의 묘사에 따르면, « 초현실주의는 – 다다 dadaïsme 의 의지에 기인한 - 뇌가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하도록 강제함으로써 광기, 꿈 그리고 무의식을 불러 일으키도록 하는 프랑스의 발명이다. 따라서, 이 새로운 문학적 운동은 부재, 수면 그리고 미지의 단편을 제공하게 될 것이다.(6) ». 초현실주의는 프랑스 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한 예술 운동 중 하나로 여겨진다. 장르, 형식, 표현의 소재와 상관없이, 20~30 년대의 많은 예술가들이 실제로 이 새로운 운동에 젖어들었다. 그들은 여기에 참여하기 위해서, 혹은 적어도 아방가르드 예술가들과 교류하기 위해서 파리에 왔다. 만 레이 Man Ray 의 다음 글은, 당시 예술가들이 초현실주의에 얼마나 매료 되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
« 지금까지 오직 초현실주의만이 암실 속에서 진정으로 빛나고 압도적인 형식을 이끌어 낼 수 있었던 힘이었다. 그것은 결코 도전하는 것을 두려워하지도 않았으며, 우리의 완전한 충동에 배신 하지도 않았고 너무 신중하게 혹은 조심스럽게 행동하지 않았다. 우리는 어떤 착각이 미적 관심사를 ‘아름다움’과 ‘도덕성’으로 이어지게 하는지 알고 있다. 수염의길이가지성과정력의힘을가리키는지점까지말이다(7) ».
그리고 우리는 초현실주의 보다 상위개념이라고 할 수 있는 아방가르드에도 주목해야 한다. 아방가르드는 제 1 차 세계대전 중에 그 충격과 기존 체제에 대한 거부감의 반동으로 나온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아방가르드의 도래와 그 전개가 곧 예술의 수도로서 이 도시의 지위인 것이다. 당시의 정세 그리고 파리의 상황을 매우 잘 반영하는 도미니크 바케 Dominique Baqué 의 글을 보자. 그렇게 파리는 예술과 아방가르드의 중심지가 된다 :
« [...] 그러나 20 년대 이후, 베를린, 데사우 또는 모스크바에 먼저 뿌리내리고 있었던 아방가르드는 그 화합과 전개를 위한 새로운 장소를 모색하는 듯했다. 해외로 도시의 진정한 마력을 발휘하고 있었고 범세계주의의 주요한 점들로 특징지어진 파리, 당시 예술의 세계주의는 그런 파리를 문화적 교류의 장으로 설정했다.예를 들어, 예술가들 간의 교류, 무엇보다도 분야 간의 교류(많은 사진 작가는 그림을 그렸고, 그 반대로 화가도 사진을 활용했다. 음악가, 작가 또는 엔지니어들)와 정치적 망명의 이주가 짙어진 국가 간의 교류(미국, 동쪽의 나라들, 독일, 이탈리아)를이야기할수있다(8) ».
그렇다면 이 현상은 결국 어떤 결과를 불러왔을까? 이 문화적 다양성이 불러오는 효과와 파괴력에 대해서 – 특히 창작의 영역에서 다양성이 가져오는 영향을 – 상상해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그 중요성에 대해서는, 19 세기 동시대에 살았던 영국의 대표적인 공리주의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 John Stuart Mill 이 유럽의 다양성이 유럽의 발전을 낳는다고 매우 명확히 주장하는 구절을 인용하면서, 다시 한번 강조해 볼 수 있다 :
«유럽이 지금까지 이런 운명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인가? 무엇이 유럽 민족들로 하여금 정체되지 않고 계속해서 진보할 수 있게 만들었는가? 어떤 사람은 유럽 민족들의 우수성을 이야기한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은 결과일 뿐 결코 원인이아니다.유럽을유럽답게만든요인,그것은바로성격과문화의 놀라운 다양성이다. 개인이나 계급, 그리고 민족이 극단적으로 서로 다르다. 이들 각자가 엄청나게 다양한 길을 찾아 헤매면서 무언가 가치 있는것들을만들어냈다(9) ».
밀은 개별성을 강조하면서 이 부분을 쓴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그는 개별성이 발전과 같은 것이라고 강조하는데(10), 여기서 우리는 그 근원이 다양성이라는 것을 알아 차릴 수 있다. 나아가, 이 다양성의 구체적 사례나 그 작용 그리고 확장 가능성 등에 대해서는, 다음의 2 장과 3 장을 통해 더 자세하게 다뤄볼 것이다.
(다음) - #05. 민중 예술 연구의 필요성 : 파리, 민중 예술 재출현의 현장
(1) Ibid., p. 33.
(2) Ibid., p. 43.
(3) 프랑스어 원문을 참조. « En 1921, la première vague est à la fois américaine et russe – Man Ray et Berenice Abbott, George Hoyningen-Huene et Boris Lipnitzki. Puis, c’est au tour des Roumains Eli Lotar et Aurel Bauh d’arriver dans la capitale, en 1924. Au même moment, les Hongrois commencent à fuir les conditions économiques et politiques déplorables engendrées par la guerre et la dissolution de l’Empire austro-hongrois. Ergy Landau est la première à fermer son atelier à Budapest pour gagner Paris en 1923, suivie de François Kollar et de Brassaï en 1924, puis d’André Kertész, de Rogi André, de Nora Dumas l’année suivante, et d’Emeric Feher en 1926. À cette époque, les Allemands et les Autrichiens commencent à affluer à Paris : Germaine Krull et Lisette Model arrivent en 1926. Mais c’est surtout après la crise de 1929, dont les effets se feront plus rapidement sentir outre-Rhin, et l’arrivée d’Adolf Hitler au pouvoir, que la vague d’immigration germanique s’intensifie : Ilse Bing (1930), Willy Maywald (1931), Ylla (1931), Wols (1932), Gisèle Freund, Gertrude Fehr, Hans Namuth, Gerda Taro, Josef Breitenbach (1933), Raoul Hausmann (1934) et Erwin Blumenfeld (1935). Dans le champ de la photographie, les grandes tendances du flux migratoire vers Paris pourraient donc se résumer ainsi : une première phase russe et américaine au début des années 1920, une deuxième venant d’Europe centrale au milieu de la décennie, puis une troisième, plus spécifiquement germanique, au début des années 1930, sans compter les oiseaux de passage, les nomades aux semelles de vent qui feront seulement de courts séjours dans la capitale, avant de s’en retourner chez eux ou de s’envoler vers des cieux plus cléments ». Ibid., p. 35.
(4) « À Paris, dans l’entre-deux-guerres, la proportion d’étrangers dans la corporation des photographes est donc assez importante. Parce qu’elle s’est focalisée sur l’activité photographique parisienne à cette époque, la collection patiemment réunie pendant plus de quarante ans par Christian Bouqueret permet, mieux que n’importe quelle autre source documentaire, de le vérifier. Sur les cent vingt photographes que compte la collection, quarante-six sont d’origine étrangère – soit près de 40%, ce qui est considérable ». Ibid.
(5) Cf. André Breton, Manifestes du surréalisme, Paris, Gallimard, éd. Jean-Jacques Pauvert, 1962.
(6) Ronny Gobyn et Sam Stourdzé. 2019 (dir.). « Variétés : Avant-garde, surréalisme et photographie, 1928-1930 ». Cat. exp. (Arles, Rencontres de la photographie d’Arles, 1er juill.-22 sept. 2019). Arles : Actes Sud, p. 16.
(7) Cf. Man Ray, « Sur le réalisme photographique », Cahiers d’art, no5-6, 1935, p.120., dans Quentin Bajac, Clément Chéroux et François Denoyelle. 2012 (dir.). « Voici Paris : modernités photographiques, 1920-1950 », op. cit., p. 25.
(8) Dominique Baqué, Les documents de la modernité : anthologie de textes sur la photographie de 1919 à 1939, op, cit., p. 12.
(9) 존 스튜어트 밀, 자유론, 서병훈 옮김, 책세상, 2005, p. 153. 프랑스어 원문 – John Stuart Mill, De la liberté, trad. de l’anglais par Laurence Lenglet à partir de la traduction de Dupond White, Paris, Gallimard, 1990, pp. 172-173.
(10) 이 점에 대한 밀의 묘사를 참조 ; « 지금까지 개별성이 발전과 같은 것이고, 오직 개별성을 잘 키워야만 인간이 높은 수준의 발전에 이르게 되거나 또는 이룰 수 있다고 강조했으니, 이제 이쯤에서 내가 주장하는 바를 정리할까 한다 »., Ibid., p. 138. 프랑스어 원문 – p . 1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