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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Photo/Academy · Thèse

[#04] 예술과 아방가르드의 중심지 : 파리, 예술과 아방가르드의 중심지, 민석킴

by aTELIER 민석킴 2022. 12. 1.

[ 예술과 아방가르드의 중심지 ]





글쓴이 민석킴 Minseok KIM


#04
예술과 아방가르드의 중심지

 

런 다양한 맥락 아래에서이 같은 요소들의 합은 당시의 예술가들에게 하여금 이 도시 파리의 력에 저항할 수 없게 했다루 Clement Chéroux 의 현에 따르면파리는 « 상 예술의 수도였고든 창작의 력을 끌어당기는 의 도시였다(1) ». 그리고 프랑아즈 드누옐 François Denoyelle 은 파리가 « 서구 세계의 예술적 영향력에 있어 중심 중에 중심인 것이 확(2) »고 사 하기도 한다게 전 세계의 예술가들이 파리로 모여들고그 다양한 국적이 문화 정성의 비옥함을 가져왔으며그것은 작의 기와 기 그리고 소재 등으로 작했다그러로 이 장의 목적은 그 결은 어떤 특을 는지도시 안에서도 그 활동의 중심이 되었던 은 어디였는지 그리고 당시 주목 할 만한 예술의 경향은 무엇이었는지 등을 살펴보는 것이다.

 

1. 파리로 모여드는 예술가들

          게다가 파리를 예술의 수도라고 부를 수 있었던 이 순간에이 도시에는 다양한 국적의 예술가들이 중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여러 문화의 그것이 이 결의 가장 주요한 특이라고 할 수 있다이와 같은 관점에서특히 양차 세계대전 사이의 기간 안 사진 분야에서 그 특이 인상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그 배경에는 앞서 살펴본 일반 맥락들 이외에도 사진기술의 비약적 발전사진 예술을 싼 다양한 론의 형성 그리고 방가르드 예술가들의 사진 사용 등도 고려되어야 한다이러한 경향에 대한 클레망 셰루 Clément Chéroux 의 자세한 분석에 따르면, 20 년대 초반에서 후반지 순서대로 국과 러시를 중심으로 한 첫번째 이 있었고 – 만 이 Man Ray 와 베르니스 아트 Bernice Abbott, 이어서 와 가리 – 라사이 Brassaï 와 앙드레 케테즈 André Kertész, 그리고 일과 오스트에서의 유입 – 제르만 크룰 Germaine Krull 과 라울 만 Raoul Hausmann 등을 확인할 수 있다(3)특히 이 시기유럽과 일에서 파리로 들어오는 이민의 물결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스트-가리 제국의 해와 히러 정의 집권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기도 하다은 외국인 예술가가 파리에 유입되었다양차 세계대전 사이의 사진들을 주로 수하는 수가 스티앙 케레 Christian Bouqueret 의 컬렉션에 의하면당시 활동한 사진가의 약 40 로가 외국인이었던 것으로 나타(4).

 

2. 초현실주의 출현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다의 예술 사에 그 시기와 순서에 대한 명확한 기을 정하는 것은 힘들다그러나 더욱 본적인 것을 생하지 않서는 안된다그것은 19 세기 만주의 쇠퇴에 이은 사주의인상주의현주의방가르와 다다이즘으로 이어지는 경향들 그리고 초현주의의 출현 등이 모두 이 도시를 그 활동 배경으로 하거나 적어도 대한 영향 아래 있다는 점이다앞서 살펴본 몇몇 역사적 맥락의 파도가 그 흐름을 야기하고가 그 결과파리가 더욱더 예술의 중심지로서 그 지위를 고히 하는 원인이 된다그 중에서도 특히, 20년대의 파리에서 그의 리더라고 할 수 있는 앙드레 브르통 André Breton 이 첫 번째 『초현주의 선언 』 Manifeste du surréalisme(5) 을 발하면서예술의 중심지로서의 도시 영향력을 가속화하는 운 예술운동들이 등장하게 된다르통의 사에 따르면, « 초현주의는 – 다다 dadaïsme 의 의지에 기인한 가 무것도 생하지 하도록 으로써 광꿈 그리고 무의식을 러 일으도록 하는 프랑스의 발명이다따라서이 운 문학적 운동은 부재수면 그리고 지의 단편을 제하게 될 것이다.(6) ». 초현주의는 프랑스 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한 예술 운동 중 하나로 여진다장르형식현의 소재와 상관없이, 20~30 년대의 은 예술가들이 제로 이 운 운동에 어들었다그들은 여기에 여하기 위해서은 적어도 방가르드 예술가들과 교하기 위해서 파리에 왔다만 이 Man Ray 의 다음 글당시 예술가들이 초현주의에 얼마나 매료 되었는지를 잘 보여다 :

 

« 지금까지 오직 초현실주의만이 암실 속에서 진정으로 빛나고 압도적인 형식을 이끌어 낼 수 있었던 힘이었다. 그것은 결코 도전하는 것을 두려워하지도 않았으며, 우리의 완전한 충동에 배신 하지도 않았고 너무 신중하게 혹은 조심스럽게 행동하지 않았다. 우리는 어떤 착각이 미적 관심사를 ‘아름다움’과 ‘도덕성’으로 이어지게 하는지 알고 있다. 수염의길이가지성과정력의힘을가리키는지점까지말이다(7) ».

 

 

          그리고 우리는 초현주의 보다 상위념이라고 할 수 있는 방가르에도 주목해야 한다방가르는 제 차 세계대전 중에 그 충격과 기존 제에 대한 거부의 반으로 나온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방가르의 도와 그 전가 곧 예술의 수도로서 이 도시의 지위인 것이다당시의 정세 그리고 파리의 상을 우 잘 반영하는 도크 케 Dominique Baqué 의 을 보자게 파리는 예술과 방가르의 중심지가 된다 :

 

 

« [...] 그러나 20 년대 이후, 베를린, 데사우 또는 모스크바에 먼저 뿌리내리고 있었던 아방가르드는 그 화합과 전개를 위한 새로운 장소를 모색하는 듯했다. 해외로 도시의 진정한 마력을 발휘하고 있었고 범세계주의의 주요한 점들로 특징지어진 파리, 당시 예술의 세계주의는 그런 파리를 문화적 교류의 장으로 설정했다.예를 들어, 예술가들 간의 교류, 무엇보다도 분야 간의 교류(많은 사진 작가는 그림을 그렸고, 그 반대로 화가도 사진을 활용했다. 음악가, 작가 또는 엔지니어들)와 정치적 망명의 이주가 짙어진 국가 간의 교류(미국, 동쪽의 나라들, 독일, 이탈리아)를이야기할수있다(8) ».

 


 

          그다면 이 현상은 결국 어떤 결과를 러왔을? 이 문화적 다양성이 러오는 과와 파력에 대해서  특히 작의 영역에서 다양성이 가져오는 영향을 – 상상해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니다그리고 그 중요성에 대해서는, 19 세기 시대에 살았던 영국의 대적인 리주의 학자존 스튜트 밀 John Stuart Mill 이 유럽의 다양성이 유럽의 발전을 는다고 우 명확히 주장하는 구을 인하면서다시 한번 강조해 볼 수 있다 :

 

«유럽이 지금까지 이런 운명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인가? 무엇이 유럽 민족들로 하여금 정체되지 않고 계속해서 진보할 수 있게 만들었는가? 어떤 사람은 유럽 민족들의 우수성을 이야기한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은 결과일 뿐 결코 원인이아니다.유럽을유럽답게만든요인,그것은바로성격과문화의 놀라운 다양성이다. 개인이나 계급, 그리고 민족이 극단적으로 서로 다르다. 이들 각자가 엄청나게 다양한 길을 찾아 헤매면서 무언가 가치 있는것들을만들어냈다(9) ».

 

 성을 강조하면서 이 부분을 . 그리고 다 으로 그는 성이 발전과 같은 것이라고 강조하는데(10), 여기서 우리는 그 원이 다양성이라는 것을 알아 릴 수 있다이 다양성의 구적 사례나 그 작 그리고 확장 가성 등에 대해서는,  2 장과 3 장을 통해 더 자세하게 다뤄볼 것이다.

 

(다음) - #05. 민중 예술 연구의 필요성 : 파리, 민중 예술 재출현의 현장

 

 

(1) Ibid., p. 33.

(2) Ibid., p. 43.

(3) 프랑스어 원문을 참조. « En 1921, la première vague est à la fois américaine et russe – Man Ray et Berenice Abbott, George Hoyningen-Huene et Boris Lipnitzki. Puis, c’est au tour des Roumains Eli Lotar et Aurel Bauh d’arriver dans la capitale, en 1924. Au même moment, les Hongrois commencent à fuir les conditions économiques et politiques déplorables engendrées par la guerre et la dissolution de l’Empire austro-hongrois. Ergy Landau est la première à fermer son atelier à Budapest pour gagner Paris en 1923, suivie de François Kollar et de Brassaï en 1924, puis d’André Kertész, de Rogi André, de Nora Dumas l’année suivante, et d’Emeric Feher en 1926. À cette époque, les Allemands et les Autrichiens commencent à affluer à Paris : Germaine Krull et Lisette Model arrivent en 1926. Mais c’est surtout après la crise de 1929, dont les effets se feront plus rapidement sentir outre-Rhin, et l’arrivée d’Adolf Hitler au pouvoir, que la vague d’immigration germanique s’intensifie : Ilse Bing (1930), Willy Maywald (1931), Ylla (1931), Wols (1932), Gisèle Freund, Gertrude Fehr, Hans Namuth, Gerda Taro, Josef Breitenbach (1933), Raoul Hausmann (1934) et Erwin Blumenfeld (1935). Dans le champ de la photographie, les grandes tendances du flux migratoire vers Paris pourraient donc se résumer ainsi : une première phase russe et américaine au début des années 1920, une deuxième venant d’Europe centrale au milieu de la décennie, puis une troisième, plus spécifiquement germanique, au début des années 1930, sans compter les oiseaux de passage, les nomades aux semelles de vent qui feront seulement de courts séjours dans la capitale, avant de s’en retourner chez eux ou de s’envoler vers des cieux plus cléments ». Ibid., p. 35.

(4) « À Paris, dans l’entre-deux-guerres, la proportion d’étrangers dans la corporation des photographes est donc assez importante. Parce qu’elle s’est focalisée sur l’activité photographique parisienne à cette époque, la collection patiemment réunie pendant plus de quarante ans par Christian Bouqueret permet, mieux que n’importe quelle autre source documentaire, de le vérifier. Sur les cent vingt photographes que compte la collection, quarante-six sont d’origine étrangère – soit près de 40%, ce qui est considérable ». Ibid.

(5) Cf. André Breton, Manifestes du surréalisme, Paris, Gallimard, éd. Jean-Jacques Pauvert, 1962.

(6) Ronny Gobyn et Sam Stourdzé. 2019 (dir.). « Variétés : Avant-garde, surréalisme et photographie, 1928-1930 ». Cat. exp. (Arles, Rencontres de la photographie d’Arles, 1er juill.-22 sept. 2019). Arles : Actes Sud, p. 16.

(7) Cf. Man Ray« Sur le réalisme photographique », Cahiers d’art, no5-6, 1935, p.120., dans Quentin Bajac, Clément Chéroux et François Denoyelle. 2012 (dir.). « Voici Paris : modernités photographiques, 1920-1950 »op. cit.p. 25.

(8) Dominique Baqué, Les documents de la modernité : anthologie de textes sur la photographie de 1919 à 1939op, cit., p. 12.

(9) 존 스튜어트 밀자유론서병훈 옮김책세상, 2005, p. 153. 프랑스어 원문 – John Stuart Mill, De la liberté, trad. de l’anglais par Laurence Lenglet à partir de la traduction de Dupond White, Paris, Gallimard, 1990, pp. 172-173.

(10) 이 점에 대한 밀의 묘사를 참조 ; « 지금까지 개별성이 발전과 같은 것이고오직 개별성을 잘 키워야만 인간이 높은 수준의 발전에 이르게 되거나 또는 이룰 수 있다고 강조했으니이제 이쯤에서 내가 주장하는 바를 정리할까 한다 »., Ibid.p. 138. 프랑스어 원문 – p . 1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