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쟁의 발발과 정치 · 경제적 배경 : 파리, 예술과 아방가르드의 중심지 ]
글쓴이 민석킴 Minseok KIM
#03
전쟁의 발발과 정치 · 경제적 배경
이처럼 이 시대의 파리는, 근대성의 시대와 자본주의 문화를 다룬 발터 벤야민 Walter Benjamin 의 작품 제목처럼, 『19 세기의 수도 Paris, capital du XIXe siècle(1) 』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 도시를 기능적 시각으로만 평가하는 것은 잘못이다. 클레망 셰루 Clément Chéroux 가 잘 지적한 것처럼, 다른 한편으로 이 시기의 파리는 « 급성장하는 산업화와 결국엔 도시민들을 삼켜버리는 문어발식 도시 개발 등 진보의 허브 »인 것으로 보이기도 했기 때문이다(2). 그리고 마침내 유럽에는 이 모든 것을 전복 시키거나 재출현하게 만들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가속화의 원인을 제공하는 전쟁이라는 구름이 드리우게 된다.
1. 양차세계대전
전쟁은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다. 1914 년부터 1918 년까지 무려 4 년 동안 이어진 1 차 세계대전은 혼돈 그 자체였다. 그나마 전쟁에서 승리한 프랑스는, 패배한 독일, 혁명기의 러시아, 식민지 관리에 여념이 없는 영국과 다르게 전쟁 이후 유럽대륙에서 가장 강한 국가인 것으로 보였다. 프랑스 전역에서, 전쟁의 죽음이 만든 빈자리는 공장, 농장 그리고 광산 등에 수많은 일자리를 만들었고, 그렇게 1920 년대 초반부터 프랑스를 향한 이민의 물결이 시작되었다. 이 뿐만이 아니다. 전쟁은 정치적 이유의 인구이동 역시 야기했다. 민족주의 박해 그리고 정치 혁명과 독재정치를 피하려는 인구의 이동도 프랑스 내에 외국인 거주 비율 상승의 주요 원인이 되었고 결국 프랑스는 당시에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이민자를 수용하는 국가가 되었다(3). 그런 점에서, Clément Chéroux 가 인용한 Vincent Bouvet 와 Eugen Weber 의 뛰어난 1920~1930 년대에 관한 연구에 드러나는 수치들은 주목할 만하다 :
« 20 세기 초, 프랑스의 외국인 인구는 총 인구의 거의 3%인 백만 명으로 여겨졌다. 그 숫자는 1921년에 4%에 달했고, 10년 후에는 거의 두 배 가까이 치솟았다. Vincent Bouvet 는 1921 년과 1931 년 사이에 이민 인구증가가 프랑스 전체 인구증가의 74%를 차지한다고 말한다(4). Eugen Weber 가 1930 년대에 대한 훌륭한 연구에서 보여주듯이 « 프랑스는 미국 이전에세계에서가장많은이민자를받아들이는나라가되었다(5) »(6).
2. 정치적 영향과 경제적 어려움을 피해서
당시에 정치 · 경제 · 사회의 거의 모든 맥락이 파리를 향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합스부르크 Habsbourg 왕가의 붕괴와 1933 년 히틀러의 권력 장악은 정치적 영향권을 벗어나려는 흐름을 형성하는데 주요한 요소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
« 1920년, 많은 예술가들이 파리로 모여들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붕괴와 함께 중부 유럽의 지도가 다시 그려지고 있었다. 베르사유 조약에 의해 야기된 지정학적, 경제적, 문화적 격변은 지식인, 언론 및 예술가들에게 이민에 대한 새로운 흐름을 초래했다. 그들은 1789년 프랑스혁명의 보편적 가치와 파리의 예술적 영향에 매료되었던 것이다. [...] 소비에트 연합 신정치경제(NEP)의 종식, 1929년 경제 위기, 그리고 마침내 1933년 독일에서 히틀러의 권력 장악은 자유의 땅인 파리에 사람들을 이끌었고, 그 후로 이민은 10년간 계속 되었다(7) ».
1 차 세계대전의 후유증과 동유럽 체제의 붕괴로 대표되는 당시 유럽의 정치 상황은 유럽 전체의 경제 상황과도 긴말한 연관이 있다. 이미 18 기 후반부터 19세기 중반 까지 영국과 파리를 중심으로 한 산업혁명과 그에 힘입은 기술 · 경제 · 문화의 발달 – 벨 에포크 Belle Époque 로 불리는 – 을 경험하기 위한 관심이 파리를 향해 있었지만, 더불어 미국에서 시작되어 2 차 세계대전까지 이어진 1929년 세계 대공황 같은 경제적 맥락 역시 당시 예술가들의 파리 유입에 주요한 요인이자 결정적 배경으로 여겨질 수 있다 :
« 정치적, 경제적 이유로 1920년대 중반, 특히 동유럽 사진가들이 파리로 대량 유입되었다. 1929년의 위기가 세계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지만 프랑스의 활기는 유럽의 이웃 국가들 보다 조금 더 느리게 둔화되었고, 특히 사진 분야의 활기는 1930년대 중반 까지 유지 될 수 있었다(8) ».
이것은 사진의 역사일 뿐만 아니라, 예술과 문화 전반의 역사였다. 이러한 정치적, 경제적 배경은 파리를 중심으로 아방가르드 예술이나 초현실주의 같은 예술사와 현대 문화 속 기념비적 개념과 예술사조 도래의 계기가 된다.
(다음) - #04. 예술과 아방가르드의 중심지 : 파리, 예술과 아방가르드의 중심지
(1) Walter Benjamin, Paris, capitale du XIXe siècle, Œuvres, t. III, trad. de l'allemand par Maurice de Gandillac, Pierre Rusch et Rainer Rochlitz, Paris, Gallimard, 2000, pp. 44-66.
(2) Quentin Bajac, Clément Chéroux et François Denoyelle. 2012 (dir.). « Voici Paris : modernités photographiques, 1920-1950 », op. cit., p. 40.
(3) 이런 이동을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는 발췌 전체를 살펴 볼 수 있다., Clément Chéroux, « 사진에서의 범세계주의. 문화적 교류와 파리의 초상사진들 Du cosmopolitisme en photographie. Portrait de Paris en échangeur culturel » dans Quentin Bajac, Clément Chéroux et François Denoyelle. 2012 (dir.). « Voici Paris : modernités photographiques, 1920-1950 », op.cit., p. 33. : « Les raisons de la confusion résident en fait davantage dans la situation plus générale de la France à l’époque. Après la victoire de 1918, le pays apparaît comme la plus grande puissance du continent européen. L’Allemagne a perdu la guerre, la Russie est en pleine révolution, l’Angleterre, tout occupée par son empire colonial. La France bénéficie donc d’une aura d’attractivité, renforcée par le fait que l’une des autres conséquences de la guerre et de son million et demi de morts est d’avoir laissé l’Hexagone exsangue en main-d'œuvre. Dès le début des années 1920, le pays connaît donc l’une des vagues d’immigration les plus importantes de son histoire. Par phases successives, des Belges, des Polonais, des Hongrois, des Yougoslaves, des Italiens, des Espagnols, des Portugais et des Marocains viennent occuper les postes laissés vacants dans les usines, les fermes et les mines. À cette immigration économique, il faut ajouter les déplacements de populations pour raisons politiques : Juifs ou Arméniens fuyant les pogroms, ressortissants russes chassés par la révolution bolchévique, peuples de gauche redoutant les régimes autoritaires qui s’instaurent dès 1919, à commencer par celui de l’amiral Miklós Horthy en Hongrie ».
(4) 참조. Vincent Bouvet, Gérard Durozoi, Paris, 1919-1939. Art et culture, Paris, Hazan, 2009, p. 21.
(5) 참조. Eugen Weber, La France des années 30. Tourments et perplexités, trad. de l’anglais par P.-E. Dauzat, Paris, Fayard, 1994, p.123.
(6) Quentin Bajac, Clément Chéroux et François Denoyelle. 2012 (dir.). « Voici Paris : modernités photographiques, 1920-1950 », op. cit., p. 33.
(7) Ibid., p. 44.
(8) Ibid., p.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