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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Photo/Traduction · Étude

[번역] 아트프레스artpress 대담 시리즈, 사진 - 1. 역사들, « 사진 이후의 이미지 », 도미니크 바케 Dominique Baqué, 레지스 뒤랑 Régis Durand # 02

by aTELIER 민석킴 2022. 1. 14.

Les grands entretiens d'artpress, La photographie - 1. Des histoires, Paris, artpress, 2016.

아트프레스 artpress의 대담 시리즈, 사진 - 1. 역사들, 파리, 아트프레스, 2016.

 

 


 

 

« 사진 이후의 이미지 L'image après la photographie » # 02

pp. 50-59.

 

 

지시로서의 이미지들 

DES IMAGES COMME DES SIGNAUX

 

     R.D. 이 변화들을 인지하고 설명하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이 사회학과 기술의 역사라는 것을 암시하는 멜랑꼴리한 mélancolique 태도, 즉 "아리스토텔레스식 aristocratique" 태도(10)를 취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불안정한 존재론적 매체, 즉 그것의 본질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의 대상이 되어 왔던 매체의 소멸 disparition d'un médium을 애도하는 것이 아니라, 본다는 것의 양상과 그 본질에 대한 가정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진들은 세계에 대한 하나의 가설이었으나, 이제 그 가정은 약해졌다고 할 수 있어요. 
     오늘날 생산된 이미지들은, 겉보기에 그것이 아무리 나르시즘적이더라도 더 이상 주제를 이미지 vision(11)의 중심에 두지 않습니다. 그런 다음 세상이 우리 자신들과는 독립적인 것으로 보여지게 하죠. 때때로 환상적인 아름다움의 형태이지만, 사진에 가치를 부여했던 출현과 소멸 apparition et disparition 그리고 존재와 부재 présence et absence 사이의 긴장 없이 말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이미지 제작 기술의 진보는 본질적 essentielle이면서도 동시에 부차적 secondaire인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본질적으로, 이것이 세계를 묘사하는 새로운 방법 – 우리가 강조한 이 분광적 특징과 함께, 마치 코드화/디코딩 후에만 읽을 수 있는 먼 행성의 이미지 처럼 암호의 해독을 요구하는 이 끝없는 순간적 가설의 생산물 – 이기 때문에, 이것은 묘사 représentations가 아니라 지시 signaux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질적이면서도 부차적인 것은, 기술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뒷받침하는 사유가 중요하다는 점을 고려하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안드레아 구르스키 Andréas Gursky와 토마스 루프 Thomas Ruff의 작업은 모범적인데, 그들이 사용하는 가장 정교한 기술은 이 세계를 해석하는데 큰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정확하게 사진적인 그 작업들(저는 토마스 루프의 야간 투시경을 사용하여 제작한 시리즈를 떠올렸어요), 그 중 몇몇은 현재 기술을 상당부분 앞지른 것으로 보여지기도 합니다.

 

     D.B. 몇가지 층위로 나누어 답변하기로 하죠. 먼저, 저는 새로운 소셜 네트워크에 전혀 끌리지가 않아요. 저는 단지 그들이 그들의 방식대로 세계를 재편성하고, 이미지의 지형을 다시 그리고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있을 뿐이죠. 사실은 빈약하지만 동시에 미니멀해 보이는 방식이고, 잠재적으로 폭발적인 효과를 가졌어요. 이어서 제 답변의 두번째 지점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전 각각의 매체에 고유한 본질이 존재한다는데에 확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클레멘트 그린버그 Clement Greenberg(12)의 회화매체의 본질에 대한 논문에도 동의하지 않고요. 미국 표현주의회화의 급성장 당시의 관점을 취하고 있는 그의 분석은 오늘날에는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13). 특히 젊은 예술가들에게 있어서 그의 분석은 시대에 뒤떨어지고, 또 의미없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처럼 보여요. 오늘날엔 대부분의 것들이 매체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순환하죠. 그들에게 "순수성 pureté"에 관한 질문은 생소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점점 더 광범위하게 퍼지고 있습니다. 몇 년 전에는 사진과 비디오, 그리고 때때로 설치물 사이에서 그 순환이 이루어 졌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 모든 표현방식들 pratiques  – 소리와 음악과 춤을 더해야만 하는 – 사이에서 그것이 이루어 집니다.
     세번째이자 마지막 지점을 이야기하도록 하죠. 네, 확실히 구르스키는 위대한 훌륭한 예술가입니다. 저를 불편하게 하는 것은 이런 위치의 사진가에게 얼마나 많은 "팔로워 suiveurs"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이런 객관주의 Objectivisme의 "작은 주인들 petits maîtres"에게 지쳤고, 조만간 형식의 교체에 대한 여지가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14).
 

 

 

이원성과 양면성

DUALITÉ ET AMBIVALENCE

 

     R.D. 저로서는 (모든 다른 매체도 마찬가지 이지만) 사진 매체의 고유한 특성을 포기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대로 이해되지 않은 반모더니즘 anti-modernisme이 우리를 그렇게 하라고 설득하려고 했던 것처럼요. 그러나 소수의 물신주의자 fétichistes와 본질주의자 essentialistes를 제외하고, 우리는 보다 섬세하고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배웠죠.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사진은 그 자체로 하나의 매체인가요? 사진은 오히려 서로 다른 매체 사이를 이동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오늘날 예술에서는 바로 그것이 예술로의 존속을 보장하는 것이지 않나요? 이처럼 그것은 신속함, 가변성 뿐만 아니라 근사치, 채도 , 무용함 같은 설득력 없는 분석적 요인으로 표현 되는 보다 최근의 이미지 형태(15)와는 달리 세계에 대한 가정을 형성하는 유일한 수단으로 남아 있습니다. 반대로 사진에서 값진 점이 있는데, 그것은 사진과 촬영된 대상 뿐만 아니라 사진과 촬영자와의 관계에 관한 이원성 dualité과 양면성 ambivalence입니다. 물론 그것은 증언하거나 묘사하는데에 사용 될 수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하나의 순수한 매체이죠. 그러나 사진은 다른 어떤 것보다 불투명해 보이는 것을 깨뜨리고 의문을 제기하는 것에 적합하고, 또 사진은 비판적 행위 actes critiques와 사고하는 행위 actes de pensée, 이 두가지 형식 모두를 생산해 낼 수도 있습니다(16).

 

     D.B. 네, 이 마지막 분석에 저도 매우 공감합니다. 어떻게 보면 "사진은 모든 것을 마주하고 대항하는 La photographie envers et contre tout(17)" 것이지요. 저는 – 그러나 이 선택에는 분명히 주관적인 부분이 있습니다 – 최근 몇년 전부터, 그것이 야기하는 이론적 담론과 그것이 생성하는 형식 모두에서 완전히 새로운 흥미를 경험하고 있는 다큐맨터리 제작에 큰 희망을 갖고 있습니다. 물론, 사진 매체의 이 특수한 접근 방식의 객관성, 투명성 그리고 진실성으로 가정된 환상을 제거한 경우에 한해서 말입니다. 이것은 보드리야르 Baudrillard의 시뮬라크르 simulacre(18)에 대항하여 도큐먼트 document가 실효성 있는 증거이자 원본을 보증하는 것 이라는데 반대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기록은 결코 잘못된 의미 전달과 오역의 위험을 수반하면서 세계를 보이지 않습니다. 기록은 그것을 구성하고, 심사숙고하고 의미를 부여합니다. 기록은 실제의 역경이 아니며 앞으로도 결코 아닐 것이라는 점을 강조해야겠습니다. 그것은 "대상의 울음 le cri de l'objet"을 듣게하지도 않고 바르트의 "오직 돌출된 사물 rien que la chose exorbitée(19)"을 보게하지도 않습니다.
     티에리 가렐 Thierry Garrel(20)의 아름다운 표현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적어도 우리가 다큐멘터리를 최근들어 개발된 아주 놀라운 "생각하는 기계 machine à penser(21)"로서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에요. 그리고 그것은 무척 다양하면서 아주 흥미로운 형태를 띄고 있으며, 알란 세쿨라 Allan Sekula(22), 질 소시에르 Gilles Saussier(23), 마크 파토 Marc Pataut(24), 스탠리 그린 Stanley Greene(25), 레이몽 드파르동 Raymond Depardo(26), 그리고 아마도 나에게는 가장 흥미로운 사람 중 한명인 기욤 에르보 Guillaume Herbaut(27)의 작업에서 발견되죠.

 


(10)

[옮긴이] '멜랑콜리 Melanolique' 라는 표현은 그 어원과 유럽의 역사적 배경 속에서 오랫동안, '어둡고 우울한 분위기'를 의미했고, 르네상스를 지나면서 신플라톤주의가 예술 · 철학 분야와 결부하여 '재능있는, 천재의' 같은 표현으로 쓰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글의 문맥을 고려하면 '멜랑콜리한 Mélancolique 태도'는 이도저도 아닌, 어느 한쪽으로 확실한 입장을 취하지 않는 태도를 염두한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식 aristocratique 태도'는 필연의 논리적 입장을 취하는 태도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겠다. 이 표현을 이해하기 위해 그의 목적론적 태도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사고는 형상-질료 개념에서 나오는 것인데, 그는 세상의 모든 물질이 '형상'과 '질료'의 결합으로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형상'은 어떤 물질이 그것일 수 있게 하는 것으로, 본질이라고 할 수 있으며, '질료'는 그 물질의 재료, 즉 그 소재를 가리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식 태도에 따르면 세상 모든 물질은 형상(본질)과 질료(재료)을 갖고 있으며, 이 두가지 개념은 불가분의 결합 관계에 있게 되는 것이이다.

참조. 『철학vs철학』, 강신주 지음, 그린비, 2010.

 

(11)

[옮긴이] 일반적으로 명사 'Vision'은 '광경', '시각', '본다는 것' 등으로 해석하는 것이 빈번하지만, 여기서는 문맥상 '이미지'로 해석하는 것이 적절하다. 위에서 같은 단어를 '본다는 것'으로 해석한 바 있다.

 

(12)

Cf. les textes réunis dans Art et Culture, Mascula, 1988. Dernière édition en 2014.

[옮긴이] 1988년 Mascula에서 출판한 『예술과 문화 Art et Culture』의 2014년 간행본을 참조. 한국어 번역본으로 2019년 경성대학교 출판부에서 번역 · 출판했다. Cf. 클레먼트 그린버그, 『예술과 문화』, 조주연 옮김, 경성대학교 출판부, 2019.

 

(13)

[옮긴이] 그린버그는 그의 논문에서 여러 매체가 각각의 고유한 특성을 갖는다고 보았다. 바케가 인식한 바와 같이, 당시 미국 표현주의 회화의 급성장 배경 속에서 회화 매체와 표현방식 사이의 관계와 특성에 대한 질문과 대답이 요구되었고, 그린버그가 그 정당성을 제시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린버그의 『예술과 문화』 참조.

 

(14)

[옮긴이] 여기서 "팔로워 suiveurs", "객관주의의 작은 주인들 petits maîtres de l'Objectivisme"과 같은 표현은 소셜 네트워크의 형식에 대한 바케의 비관적 시각에 대한 결과로 해석해 볼 수 있다. 이 문맥에서 그녀는 구르스키가 얼마나 훌륭한 작업을 하는지와 상관없이 SNS 형식에서 팔로워 숫자(수의 적고 많음이 잣대가 되는)가 필연적으로 동반되는 특징에 주목한다. 바케는 이런 경향을 '객관주의 Objectivisme', 그리고 이 경향을 따르는 대중을 '작은 주인들 petits maîtres'이라는 반어적 단어로 표현했다. 

 

(15)

[옮긴이] 과거에 현실의 빛을 그대로 옮겨 담은 하나의 반영으로서 이미지와 달리, 기술의 진보로 나온 현대의 디지털 이미지(빠르고 수정이 용이하며, 각종 숫자와 데이터의 조합으로 구성 · 표기되며 대부분 실물로 존재하지 않는)를 일컬는 것으로 보인다. 

 

(16)

L'ouvrage d'Arnaud Claass, le Réel de la photographie (Filigranes, 2012), constitue, par exemple, une belle méditation sur ces questions (RD).

[옮긴이] 아르노 클라스의 저서, 『사진의 실재』, Filigranes, 2012, 이 저서는 이러한 질문에 대한 그의 깊은 성찰로 구성됨 - 레지스 뒤랑.

 

(17)

[옮긴이] 이 표현은 관용어로 흔히 "모든 것을 무릎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정도로 해석 할 수 있지만, 여기서는 문맥을 고려하여 의역하였다.

 

(18)

[옮긴이]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는 프랑스의 철학자로 대중과 대중문화 그리고 미디어 이론으로 알려져있다. 대표 저서로 1968년 Gallimard에서 출간된 『사물의 체계』 Le Système des objets : la consommation des signes, 1981년 Galilée에서 출간된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 Simulacres et Simulation 등이 있다. "시뮬라크르 Simulacre"는 라틴어에서 유래한 말로 가상, 흉내, 모의 등의 뜻을 가진다. 보드리야르는 이 개념을 본격적으로 철학적 사유에 끌어와 사용했다. 더 구체적으로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지만, 조건에 따라 실제하는 것 이상으로 생생하게 인식되는 것을 말하고 그 현상을 일컫기도 한다. 한국어 번역으로 『사물의 체계』, 배영달 옮김, 지식을만드는지식, 2011 과 『시뮬라시옹』, 하태환 옮김, 민음사, 2001 참조.

 

(19)

[옮긴이] 뒤랑은 롤랑 바르트 Roland Barthes가 그의 저서  『밝은 방, 사진에 관한 노트』 La Chambre Claire, Note sur la photographie, Paris, Gallimard, 1980 에서 사용한 표현을 인용했다. 바르트는 다음과 같이 썼다. "이 사진들에 둘러싸인 나는 릴케의 다음과 같은 시구들로 더 이상 위안을 받을 수 없었다. "추억 만큼이나 부드러운 미모사잎이 방을 에워싸네." 사진은 방을 '에워싸지' 않는다. 그것은 향기도 음악도 없고, 다만 돌출된 사물만이 있따. 사진은 폭력적이다. 그것이 폭력을 보여주기 때문이 아니라, 매번 그것이 시각을 힘으로 가득 채우고, 그 안에서는 아무것도 거부되고 변화될 수 없기 때문이다 ... " « Entouré de ces photographies, je ne pouvais plus me consoler des vers de Rilke : "Aussi doux que le souvenir, les mimosas baignent la chambre" : La photo ne "baigne" pas la chambre : point d’odeur, point de musique, rien que la chose exorbitée. La photographie est violente : non parce qu’elle montre des violences, mais parce qu’à chaque fois elle emplit de force la vue, et parce qu’en elle rien ne peut se refuser, ni se transformer ... » 참조. 롤랑 바르트, 『밝은방, 사진에 관한 노트』, 김웅권 옮김, 서울, 문예신서, 2006.

 

(20) Thierry Garrel

[옮긴이] 티에리 가렐은 영화감독이자 프랑스와 유럽의 텔레비전 다큐맨터리 분야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한명이다. 오랜 기간동안 프랑스 라디오-텔레비전 방송 협회의 연구원으로 국립 시청각 연구소Institut National de l' audiovisuel (INA)의 다큐맨터리 프로그램을 담당했다. 프-독 공영 방송 프로그램인 '아르떼 Arte'의 제작자이자 감독이기도 하다.


(21) 가렐은 2001년 아트프레스와의 인터뷰에서 "다큐맨터리는 보여주는데만 그 역할을 하는것이 아니라, 생각하게 하는 역할도 한다."고 말하면서 다음의 표현 – "생각하는 기계 machine à penser", 을 남긴다.

참조. 아트프레스 artpress 홈페이지 https://www.artpress.com/2001/01/01/thierry-garrel-le-documentaire-machine-a-penser/

(22) Allan Sekula

[옮긴이] 알란 세쿨라는 미국의 사진가이자 영화감독, 이론가 및 비평가이다. 2013년 사망 전까지 캘리포니아 예술 대학에서 강의했다.


(23) Gilles Saussier

[옮긴이] 질 소시에르는 프랑스의 시각 예술가로 주로 다큐맨터리적 작업을 하는 사진가이자 국립아를사진학교 École Nationale Supérieur de la Photographie(ENSP)의 교수이다.

참조. 소시에르의 개인 홈페이지 http://www.gilles-saussier.fr/projets/?lang=fr

(24) Marc Pataut

[옮긴이] 마크 파토는 프랑스의 다큐맨터리 사진가이자 파리 보자르 École nationale des Beaux-arts de Paris의 교수이다.

(25) Stanley Greene

[옮긴이] 스탠리 그린은 미국의 보도 사진가이다. 화가로 일을 시작했지만 종종 카메라를 사용하기도 했다. 친구 유진 스미스 Eugene Smith가 그의 스튜디오에서 함께 일할 수 있게 해줬고, 동시에 SVA(School of Visual Art of New York)에서 사진을 공부 하도록 장려했다. 뉴욕의 잡지사들에서 저널리스트로 활동했으며, 프랑스 파리의 에이전시 뷰 Agence Vu 에서 일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히로인에 빠진 소녀들을 취재한 작업과 1989년 베를린 장벽으 붕괘 순간을 기록한 작업이 있다. 2007년 파리에서 사망했다.

(26) Raymond Depardon

[옮긴이] 레이몽 드파르동은 프랑스의 사진가, 저널리스트 그리고 다큐멘터리 감독이며, 가장 영향력 있는 사진가 중 한명으로 매그넘 포토스 Magnum Photos의 멤버이다.

(27) Guillaume Herbaut

[옮긴이] 프랑스의 사진가이자 저널리스트이다. 우크라이나의 체르노빌을 취재한 작업으로 잘 알려져있으며 에이전시 뷰의 멤버이다. 2009과 2012년에 세계보도사진상, 2012년 니에프스상 Prix Niépce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