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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리뷰] 『담론』, 신영복 - # 09. 양복과 재봉틀

aTELIER 민석킴 2022. 3. 29. 16:56

『담론』, 신영복 지음, 돌베개, 2015.

 

 

# 09. 양복과 재봉틀


pp. 138-139.

자공子貢이 밭일 하고 있는 노인에게 기계를 사용할 것을 권유합니다. 용두레라는 기계를 쓰면 쉽게 밭에 물을 줄 수가 있는데 왜 그렇게 고생을 하시느냐고 묻습니다. 그 말에 노인이 분연작색忿然作色, 벌컥 화를 내다가 곧 웃으며 말합니다. 노인은 그의 선생님으로부터 들을 것이라 하면서 차근차근 반기계론을 전개합니다. 기계와 기술의 신화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로서는 장자의 이야기가 비현실적입니다. 그러나 매우 성찰적인 이야기입니다. 기계라는 것은 노동절약적인 기술을 구현하는 체계입니다. 기계는 수고를 덜어 주고 시간을 단축시키는 역할 즉 장자의 표현에 의하면 '기사'機事가 반드시 있습니다. 자공이 노인에게 이야기했던 기계의 장점이 바로 이 기사였습니다. 그러나 장자가 전개하는 반기계론은 그 기사 때문에 '기심'欺心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좀더 쉽게 하려는 마음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이러한 기심이 생기면 순수한 마음이 없어집니다. 일을 쉽게 하려고 하고. 힘 들이지 않고 그리고 빨리 하려고 하는 이런 기심이 생기면 순수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리고 순백불비純白不備하면 신생부정神生不定이라고 했습니다. 신생神生은 생명력이란 뜻입니다. 생명력이되 정신적 측면에 방점이 있는 그런 의미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생명력이 불안해진다(不定)는 것입니다. 정처定處를 얻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생명력이 정처를 얻지 못하면 도를 실현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장자반기계론입니다. 내가 용두레라는 기계를 몰라서가 아니라 부끄러이 여겨서 그것을 사용하지 않을 뿐이라는 것이었습니다.

 

p. 142.

     그리고 여기서 주의해야 하는 것은 기계가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기계가 도입되면 6시간 걸리던 필요노동시간이 3시간으로 줄어듭니다. 기계가 갖는 효율로 말미암아 6시간 걸리던 것이 이제 3시간밖에 걸리지 않게 된다는 것은 그 생산물의 가치가 6에서 3으로 줄어들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가치량이란 그 속에 담긴 노동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효율성이 높은 기계를 사용해서 만들었거나 효율성이 낮은 기계를 사용해서 만들었거나 시장에서 동일한 가격으로 거래되기 때문에 가치와 가격을 같은 뜻으로 이해합니다만 기계는 가치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줄이는 역할을 합니다. 더 효율적인 기계가 광범하게 도입되면 우리가 살아가는데에 필요한 물건들을 생산하는 데에 필요한 노동시간이 훨씬 더 줄어듭니다. 1일 8시간 노동이 4시간으로 단축될 수 있습니다. 주 5일 근무가 주 3일 근무로 단축될 수 있습니다. 노동시간이 단축되지 않는 이유를 여러분이 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pp. 143-144.

시골에 사는 허서방이 서울로 올라와서 큰아들이 일하는 양복점에 들러 양복 값을 물어보는 상황을 가정하고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큰아들이 양복 한 벌에 100만 원이라고 대답하자 아버지가 깜짝 놀라면서 100만 원씩이나 하느냐고 묻습니다. 50만 원은 기지 값이고 50만 원은 공전工錢이라고 대답합니다. 기지란 '옷감'의 일본말이고 공전은 노임 즉 품삯입니다. 그 말을 듣고 아버지는 첫째 딸이 일하는 방직紡織 공장으로 갑니다. 양복 한 벌 만드는 데 드는 기지 값이 50만 원이라는데 왜 그렇게 비싸냐고 묻습니다. 첫째 딸의 대답이 30만 원은 실 값이고, 20만 원은 공전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방적紡績 공장에 다니는 둘째 딸을 찾아가서 왜 실 값이 30만 원인가를 묻습니다. 10만 원은 양모羊毛 값이고, 20만 원은 공전이라고 대답합니다. 다음에는 어디로 가야 합니까? 다시 시골의 둘째 아들 목장으로 내려갑니다. 양복 한 벌에 양모 10만 원어치가 든다는데 그 값이 어떻게 되느냐고 물었습니다. 5만 원은 양羊 값이고 5만 원은 기르는 품삯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다음에는 양한테 가서 왜 양 네가 5만 원이냐고 물어야 합니다.
     양복 한 벌 값 100만 원은 따져 보면 공전+공전+공전+품삯+양입니다. 이것이 노동가치설이라고 했더니 일견 납득이 되었지만 역시 한 가지 미심쩍은 게 남았습니다. 양재공답게 하는 말이 "그럼 미싱은 어쩌고요?" 바로 이 대목입니다. 기계에 관한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양복과 똑같은 여행을 다시 시작하면 됩니다. 그럼 미싱도 다시 똑같이 가 보자 하고 이야기를 이어갔습니다. 브라더 미싱 한 대에 30만 원 정도 합니다. 30만 원의 미싱 값은 부속 값 20만 원과 공전 10만 원입니다. 부속 기계를 찾아서 기계 공작소로 갑니다. 그리고 다시 제철공장을 거쳐서 맨 나중에는 광산에 가야합니다. 노동+노동+노동+노동+철광석이 됩니다. 양과 철광석은 자연입니다. 가치 생산이란 노동과 자연이 결합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계과거 노동이 응고되어 있는 것입니다. 과거의 노동이 여기에 투입됨으로써 현재의 노동을 줄여 주는 것입니다. 기계란 그런 것입니다. 기계 자체에 대한 환상을 청산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계의 환상을 청산한다는 것은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현실적으로 기계와 기술이 돈을 벌어 주기 때문입니다. 신기술과 최신 모델의 기계를 설치하지 않고서는 경쟁에서 살아남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pp. 146-147.

     장자기계론은 이처럼 기계에 관한 논의라기보다는 '노동과 생명'에 관한 것입니다. 경제학에서 노동은 생산요소입니다. 그러나 장자의 체계에 있어서 노동은 생명 그 자체입니다. 경제학에서는 노동을 비효용으로 규정하고 최소의 희생으로 최대의 효과를 얻는 것을 경제원칙이라고 합니다. 경제원칙은 장자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기적이고 천박한 사고입니다. 고통과 방황이 가져다 주는 깨달음에 대해서는 무지하기 짝이 없습니다. 장자는 바로 이 '노동'을 성찰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피고용 노동이기 때문에 노동은 당연히 비효용이고 고통입니다. 따라서 노동시간이 적을수록 행복합니다. 노동이 과연 비효용이고 고통인가에 대해서 생각해 봐야 합니다.

 

p. 147.

     나는 감옥 독방에서 노동시간 제로인 나날도 많이 보냈습니다. 창살 밖으로 봄볕을 받은 마당에 파릇파릇 봄 싹들이 돋아나는 걸 바라보고 있으면 호미 들고 일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합니다. 장자의 신생神生입니다. 우리 사회의 열약한 노동 현실 때문에 노동에 대한 관념이 부정적입니다만 사실은 노동하지 않는 생명은 없습니다. 더 정확하게 정의한다면 노동은 '생명의 존재 형식'입니다. 첫 시간에 공부는 달팽이도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생명은 노동합니다. 한 송이 코스모스만 하더라도 어두운 땅속에서 뿌리를 뻗고 계속해서 물을 길어 올리는 노동을 하고 있습니다. 한 마리 참새인들 다르지 않습니다. 노동은 생명이 세상에 존재하는 형식입니다. 그것을 기계에 맡겨 놓고 그것으로부터 내가 면제된다고 해서 행복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기계의 효율을 통하여 더 많은 소비와 더 많은 여가를 즐기게 된다면 그것으로써 사람다움이 완성된다고 할 수 있을까요? 노동 경감과 소비 증대가 답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고 믿습니다. 노동 자체를 인간화하고 예술화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pp. 148-149.

     사람의 정체성노동을 통해서 만들어집니다. '노동'이란 표현이 어색하다면 ''이라고 하는 것이 좋습니다. 자기가 영위하는 삶에 의해서 자기가 형성되고 표현됩니다. 그러나 도시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소비와 소유와 패션이 그 사람의 유력한 표지가 되고 있습니다. 도시라는 복잡하고 바쁜 공간에서는 지나가는 겉모습만 보입니다. 집, 자동차, 의상 등 명품으로 자기를 표현합니다. 교도소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관계가 표피적이지 않습니다. 1년 365일을 함께 생활합니다. 그 사람의 적나라한 모습을 꿰뚫어 보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도소에도 명품족이 있습니다. 관에서 지급하는 죄수복을 그대로 입지 않고 그것을 양재공장에 부탁해서 해체한 뒤 새로 박음질하고 줄 세워서 다려 입고 나타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회로 치면 명품족입니다. 그 명품족을 보는 시선이 사회와는 전혀 다릅니다. 사회에서는 그 명품이 그 사람의 유력한 표지로 공인되지만, 교도소에서는 그것을 보는 시선이 대단히 냉소적입니다. '놀고 있네!', '나가면 또 들어오게 생겼다.' 이것이 일반적 반응입니다. 사람을 알고 나면 의상은 무력해집니다. 우리 시대의 도시 미학은 명품과 패션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고통과 방황이 얼마나 큰 것을 안겨 주는가에 대해서 우리 시대는 무지합니다. 이창동 감독의 <시>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할머니 역에 프랑스에서 살고 있는 여배우를 캐스팅했습니다. 국내에도 노인 여배우들이 많은데 어째서 멀리 프랑스에서 데려왔나 하고 의아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결정적 이유는 우리나라 연예인 중에는 성형을 하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노인으로서의 연륜이 얼굴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배우가 드물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화장, 성형, 의상으로는 실현할 수 없는 것이 자기 정체성입니다. 그것은 노동, 고뇌방황에 의해서 경작되는 것이라고 해야 합니다. 장자반기계론은 우리의 삶에 대한 반성입니다. 속도와 효율, 더 많은 소유와 소비라는 우리 시대의 집단적 허위의식에 대한 고발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pp. 152-153.

     마지막으로 제가 좋아하는 『장자』 구절을 소개하는 것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겨울 독방에서 이 구절을 만났을 때의 감동은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어느 불구자의 자기 성찰입니다. 불구자인 산모가 깜깜한 밤중에 혼자서 아기를 낳고 그 무거운 몸으로 급히 불을 켜서 자기가 낳은 아기를 비추어 본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그 경황없는 중에도 급급히 불을 켜서 비추어 보는 이유에 있습니다. 급히 불을 켜서 갓난아기를 비추어 본 까닭은 유공기사기야惟恐其似己也입니다. 그 아기가 혹시 자기를 닮았을까봐 두려워서였습니다. 자기를 닮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한 모정입니다. 산모는 자기가 불구라는 사실을 통절하게 깨닫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충격이었습니다. 나는 어떤가? 우리는 어떤가? 하는 통절한 반성을 안겨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날 밤의 독방이 지금도 선연합니다.
     사람들은 대체로 자기의 생각에 갇혀서 자기를 기준으로 해서 다른 것들을 판단합니다. 한 개인이 갇혀 있는 문맥 그리고 한 사회가 갇혀 있는 문맥을 깨닫는다는 것은 어쩌면 당대 사회에서는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 시대를 역사적으로 바라보면 그 시대가 갇혀 있던 문맥이 선명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당대 사회를 성찰한다는 것, 그리고 자기 자신을 성찰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불구의 산모 여지인厲之人의 몸짓은 그 통절함이 과연 자기 성찰의 정점입니다. 우리의 『장자』독법이 바로 이러한 성찰이어야 할 것입니다.